세기와 더불어 18-1. 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페이지 정보
본문
세기와 더불어 제 18장. 중일전쟁의 불길 속에서
1. 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우리가 로구교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것은 간삼봉전투가 있은 후인 1937년 7월중순경이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9.18사변이 새로운 《9.18》을 낳게 되고 일제의 만주강점이 수백만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 중국의 전령토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에로 이어지게 되리라는것을 예견해왔었다. 그러나 막상 로구교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중일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흥분을 금할수 없었다. 인민혁명군의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정세발전을 두고 많은 론의를 하였다.
론의의 중심은 두말할것도 없이 이 전쟁이 앞으로의 세계정세와 조선혁명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겠는가 하는것이였고 조성된 새로운 정세를 우리 혁명에 어떻게 유리하게 리용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기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중에는 세상에 로구교라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자체를 아는 사람이 별반 없었다.
누구도 이 다리에서 한밤중에 울린 총소리가 근 3, 000일동안이나 중국땅을 피바다에 잠그고 대전의 소용돌이속에 세계를 휘몰아넣는 전주곡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1939년 9월 파쑈독일의 뽈스까침공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로 보는것이 일반의 공인된 견해로 되고있지만 그보다 2년 앞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작한 로구교사건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중일전쟁은 9.18사변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집요하게 내세우고 완성시켜온 대아세아정책의 산물이였다. 일제가 만주를 삼켜버린 그때 벌써 세계의 진정한 여론은 그들이 멀지 않아 중국관내로 쳐들어가게 되리라는것을 시사하였다. 실지로 일제는 동북3성을 강점한후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준비에 모든 력량을 집중하였다.
1933년 1월의 산해관공략과 화북지구의 침입, 열하작전에 의한 성소재지 승덕의 점령, 진황도상륙, 하북성 동부지구에로의 진격 등 이 모든 군사작전은 일본군대가 만주사변을 도발한후 몇해사이에 있은것이며 미구에 감행하게 될 중국본토침략을 위한 준비작업의 한측면이였다.
장개석국민당정부는 일제의 화북침공에 항전으로 맞설 대신 인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국배족적인 《당고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만리장성이북의 광대한 땅덩어리를 사실상 일제의 점령지로 내맡겨버리고 화북을 일제의 감시와 통제 밑에 놓이게 하였다. 이러한 유화정책은 결국 일제의 침략적야망과 전쟁광증을 부추겨주는것으로 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사촉밑에서 화북의 친일세력은 《화북 5성자치운동》이라는것을 벌리였다. 이른바 《독립》을 요구하는 이러한 매국운동의 결과로서 친일적인 《기동방공자치정부》가 조작되였다.
이런 계단식방법으로 만주전역과 화북의 명맥을 완전히 틀어쥔 일제는 1936년초 배일운동의 엄격한 단속과 중국, 만주, 일본의 경제적합작, 공동방공 등을 골자로 하는 《대중국외교방침》이라는것을 내걸고 중국관내에 대한 침략준비를 로골화하였다. 일독《방공협정》의 체결은 새 전쟁준비를 부추기고 조장시키는 외부적요인으로 되였다.
장개석국민당정부의 굴욕적인 대일자세와 매국배족적인 정책은 일본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을 마음내키는대로 확대할수 있게 하였다. 일제의 중국본토침략이 더욱더 가속화되여 나라와 민족의 생사존망이 저울대에 오른 그때에도 장개석은 대내적으로는 홍군을 포위공격하고 인민들의 항일구국운동을 탄압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외세에 굴복하는 《안내양외》정책을 추구하면서 대일타협로선을 견지하였다. 장개석의 비굴한 대일협조정책은 결과적으로 볼 때 일본의 중국관내침략을 묵인해주는것으로 되였으며 로구교사건과 같은 엄청난 사건의 조작에로 일본을 안내하고 유도하는것으로 되였다.
일제가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단행하게 된것은 중국을 둘러싼 제국주의렬강간의 모순의 응당한 산물이기도 하였다.
1937년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경제공황의 파도는 또다시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렬강들은 새 시장들을 개척해보려고 혈안이 되였다. 시장쟁탈을 위한 싸움은 렬강들사이의 모순을 격화시키였다. 이러한 모순들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것의 하나가 바로 중국에서의 리권을 둘러싼 미, 영 제국주의자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 사이의 알륵과 대립이였다. 일제는 구미렬강과의 대결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방도를 중국과의 전면전쟁에서 찾았다. 그들은 이 전쟁만이 중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지배를 가능하게 할수 있으며 이 지역에서 미, 영 세력을 구축하고 일본을 아세아의 맹주로 되게 할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이에 대한 미, 영의 태도는 량면주의적이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무분별한 침략적망동을 제한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중국의 리익을 희생시키는 일제의 침략을 조장시키였다. 그리고 일본을 사촉하여 반쏘의 길로 나가게 하였다. 미, 영은 이런 방법으로 저들이 중국에서 본래부터 가지고있던 리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화북사변후 일본제국주의는 군비확장과 전쟁준비정책을 계속 추구하면서 동아대륙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남양으로 진출하여야 한다는 기본국책을 확정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중국과 쏘련에 대한 전쟁정책은 전쟁정책대로 추진시키면서 동시에 시기를 기다려 동남아방향으로 남하하려는 전략적방안이였다.
고노에내각은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렬강들의 《불간섭》정책을 교묘하게 리용하면서 중국내부에 아직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확고히 성립되지 못하고있던 유리한 기회를 타서 마침내 중국에 대한 전면전쟁을 도발하였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대는 군사연습중에 있던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것을 구실로 완평현성에 대한 수색을 무리하게 요구해나섰다. 이것을 발단으로 하여 충돌이 야기되였다. 일본군대는 송철원의 29군이 저항해나서자 로구교를 점령하고 베이징을 포위하였다.
로구교사건은 하나의 자그마한 우발적인 충돌이였던것만큼 현지교섭으로써도 얼마든지 해결할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도발의 구실을 찾고있던 군부의 압력밑에 고노에내각은 7월 11일 일본에 있는 사단들의 중국파견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말로는 군사적충돌의 불확대를 떠들면서도 실제로는 이 별치 않은 사건을 중일전쟁을 확대하는 구실로 리용하였다. 8월 13일에 일본군은 벌써 상해를 공격하는데 이르렀다. 로구교에서 울린 총성은 드디여 중일간의 큰 전쟁으로 번져지게 되였다.
중일전쟁의 발발은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들을 수많이 제기하였다. 우리는 격변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게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전략전술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중일전쟁의 발발과 관련한 소식을 들은후 나는 며칠동안 이 전쟁이 어떻게 번져지며 우리 혁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것인가, 우리는 이에 어떤 태도와 방법으로 대처해나갈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줄곧 사색을 거듭하였다.
중일전쟁은 일제가 화북이나 먹고 물러앉을 국지전이 아니였다. 또 만주사변처럼 몇달동안에 속전속결될 성격의 싸움도 아니였다. 이 전쟁은 그자체가 장기전으로 넘어갈수 있는 불씨를 안고있었으며 지역전쟁,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대전으로 확대될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있었다. 중일교전쌍방외에 제3의 나라들을 끌어들일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것은 일, 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였다. 력사적으로 고찰해볼 때 조선과 만주는 로, 일 각축전의 중요한 마당이였다. 그것이 금세기초에 있었던 로일전쟁발발의 주되는 원인으로 되였다. 쏘련이 성립된후에도 일본의 대륙침략야망으로 하여 여전히 쏘일간의 관계는 날카롭게 대치되여있었다. 중일전쟁전야에도 쏘련과 일본은 아무르강상에 있는 두개 섬의 령유권문제를 놓고 아슬아슬한 대결상을 보이였다. 그것은 일촉즉발의 전쟁위험을 배태한 대결이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직접적인 외교적교섭으로 분쟁은 일단 해소되였으나 일본은 그후에도 일만공동방위라는 명분밑에 매우 강경한 자세로 쏘련과 맞섰다.
세계의 대다수 여론이 쏘일간의 이 분쟁으로 큰 전쟁의 불집이 터지게 될것이라고 시사한것은 전혀 무근거한것이 아니였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다음에 중국본토를 침략하고 나아가서 몽골과 쏘련의 원동부분을 차지할 야망을 품고있다는것은 비밀이 아니였지만 일본은 쏘련과의 전면전쟁을 시기상조로 보고있는것 같았다. 그들은 날을 따라 강해지고있는 쏘련의 국력과 국방력을 은근히 두려워하고있었다.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하는 조건에서 쏘련과도 전쟁을 한다면 그보다 더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것이였다. 일본은 두개의 대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를수 있을만한 국력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우리의 적지 않은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전쟁이 확대될수록 우리 혁명에 불리한 영향이 미치게 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나는 중일전쟁발발에 대처한 전략적방침을 한시바삐 세우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투쟁해야 할 절박성을 느끼였다. 1937년 7월중순 백두산밀영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성원들의 회의와 그해 8월초 장백현 초수탄에서 소집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는 이 방략을 확정한 회의들이였다. 우리는 이 회의들에서 급변하는 정세에 주동적으로 대처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고 전반적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릴데 대한 전략적방침을 제시하였다. 백두산밀영에서 열린 회의에는 마동희, 리제순을 비롯하여 백두산지구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도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론의된 문제들가운데서 핵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은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튼튼히 꾸리고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하며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것이였다. 우리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한 방도의 하나로서 백두산서남부일대와 국내에 더 많은 지하조직을 내올데 대한 문제와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공작소조들이 랑림산줄기를 리용하여 혁명근거지를 꾸리며 국내도처에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진지하게 론의하였으며 이와 함께 신파, 장백현 하강구 일대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 하부조직건설 정형, 군중정치사업과 유격대원호사업 정형을 료해하고 그 경험을 일반화하기 위한 대책도 동시에 토의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일제는 자기 나라를 세계5대강국의 하나, 3대해군국의 하나라고 자처하고있었다. 렬강들도 그런 눈으로 일본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조만간에 무서운 함정에 빠지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일제가 초기에는 비록 중국의 항전력량에 생긴 공백을 리용하여 일시적인 우세를 차지할수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멸망하게 되리라는것을 굳게 믿고있었다. 부정의의 전쟁은 항상 내부모순을 동반하는 법이다. 자국내에서의 전쟁세력과 반전세력간의 모순과 리권쟁탈을 위한 제국주의렬강들간의 모순은 일본의 전쟁수행에 제동을 거는 무시할수 없는 요인들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여있었다. 그들은 구라파에 독일이나 이딸리아와 같은 동맹국들을 가지고있었으나 그 동맹국들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수 없는 형편에 놓여있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확대하고 《남방진출》을 단행하게 되면 그것은 불피코 제국주의렬강들간의 모순과 대립을 격화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었다.
끝없는 치부욕과 팽창욕에 환장이 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침략한 다음 그것을 채 소화하지도 않고 연방 중국본토까지 삼키겠다고 욕심사납게 덤벼들었지만 그것은 고양이가 소대가리를 맡은격이였다. 일본이 소화불량증에 걸리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제는 중일전쟁발발을 계기로 하여 조선에서 식민지통치기구들을 더욱 강화하고 완비하였다. 각종 파쑈악법들이 새롭게 조작되여 인민들의 사상과 육체를 무시무시하게 얽어매였다. 1913년부터 실시하여오던 《군기보호법》도 전시환경에 맞게 개악되였다. 적들은 《전시병참기지로서의 조선의 특수한 사명》이니 《대륙정책수행에서 조선이 걸머진 임무》니 뭐니 하면서 모든것을 전쟁수행에 복종시키였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략탈은 경제적령역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적들은 인적자원도 사정없이 략탈하였다. 청장년들을 징발하여 전쟁판에 내몰았고 막대한 로동력을 군수공장과 군사시설을 건설하는 공사장들에 강제로 동원시키였다.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할바없이 강해지고 악랄해진 일제의 파쑈적폭압과 경제적략탈은 우리 민족의 처지를 참을수 없는 막바지에 밀어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이런 불리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중일전쟁으로 하여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령활하게 리용하면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초수탄에서 열린 군정간부회의에서도 정세를 이런 각도에서 평가하고 그에 대응할것을 강조하였다. 백두산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과업을 조직건설의 측면에서 많이 론의하였다면 초수탄회의에서는 적배후교란작전방침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과업을 항일련군부대들과의 협동작전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측면에서 많이 협의하였다.
나는 이 회의에서도 역시 두만강, 압록강 연안일대를 비롯한 광활한 지역에서 적배후교란작전을 강화하며 국내에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을 더많이 파견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계속 확대강화해나갈데 대하여 힘주어 말하였다.
우리는 적배후교란작전을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벌리기로 하였다. 하나는 랑림산줄기에 의거하여 밀영망을 꾸리고 국내도처에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전민항쟁의 군사적기반을 마련하며 국내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대중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유격전의 방법으로 일본침략군의 중국관내에로의 기동을 가로막고 그들의 전략작전을 파탄시키는것이였다.
초수탄회의에서는 새로 세운 전략적방침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을 부분적으로 개편하고 부대들의 활동지역을 실정에 맞게 분담하였다. 국내에 파견할 무장소조와 정치공작소조 문제도 협의하였다.
적들은 중일전쟁을 일으킨후 우리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하고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의 군경우두머리들은 우리가 새로운 활동방침을 세우고 부대를 개편하고 활동지역을 분담하였으며 8월 29일의 국치일을 계기로 만주의 주요도시들을 공격하고 국내에로 일제히 쳐들어갈것을 협의하였다고 하면서 그 대응책을 세우느라 복닥소동을 피웠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이런 사실이 적들의 비밀문건에 상세히 기록되여있었다.
초수탄회의를 마치고 장백, 림강 현경으로 다시금 나가기에 앞서 나는 동북항일련군부대들과의 련합작전과 적배후교란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위증민을 만났다. 그 당시 위증민은 만강의 상류인 화피하기슭의 동만강밀영에서 정양생활을 하고있었다.
그날 우리 일행을 동만강밀영으로 안내한 사람은 중대정치지도원이였던 주재일이였다. 그가 동만강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있었다. 주재일은 강원도태생이였지만 어렸을 때 화룡지방에 가서 살다가 어랑촌에서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유격구가 해산될 때 화룡에서 살던 여섯세대가 초수탄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중 한세대가 주재일이네 집이였다. 주재일은 반일부대에서 사업하다가 1937년 3월에 자기 처와 함께 우리 사령부를 찾아왔다. 그때 우리는 그를 반일부대출신의 중국인병사들이 많은 중대에서 정치지도원으로 일하게 하였다. 그가 중국말도 잘하고 중국풍습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후에 그는 경위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있다가 련대정치위원으로까지 승진하였다. 주재일은 목적지까지 우리를 무사히 안내하였다.
위증민은 중일전쟁이 확대되고있는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조중 두 나라 인민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협력을 잘해나가는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조선동지들과 조선인민들의 협조에 큰 기대를 걸고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까지 중국혁명을 아무런 사심도 없이 성심성의로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먼저 조선동지들을 생각하군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전호속에서 고락을 같이한 나날들은 두 나라 력사뿐만아니라 국제공산주의운동력사에도 영원히 남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사령, 조선민족이 겪고있는 시련을 오늘은 중화민족이 겪게 되였습니다. 이 시련의 시기에 우리는 조선인민이 우리의 편에 확고히 서있게 되리라는것을 확신합니다.》
위증민의 말은 매우 절절하였다.
2군 정치위원이며 남만성위 서기의 중책을 지닌 그는 진실을 담아 이야기할줄 아는 솔직한 사람이였다.
반《민생단》투쟁의 극좌적오유를 시정하기 위한 투쟁과정이 잘 보여주는바와 같이 위증민은 그 누구보다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충과 아픔을 리해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하였다. 나는 그가 조선인민을 동정하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여러모로 도와준데 대하여 응당한 경의를 표시하여왔다. 그도 시종일관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을 가지고 나를 대해주었다.
위증민은 동북지방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인민혁명군이 수행하고있는 역할을 항상 높이 평가하군하였다.
이날 위증민은 중일전쟁이 터진후의 중국의 내외정세와 중국공산당의 대일전쟁방침에 대하여 상세하게 통보해주었다. 그 통보가운데서 특별히 두드러진것은 새로운 국공합작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실현을 위한 중국공산주의자들과 진보적애국인사들의 움직임이였다.
7.7사변이라고도 불리우는 로구교사건이 있은 다음날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이 다 떨쳐나서는 항일전쟁만이 나라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것을 밝히면서 《민족통일전선의 튼튼한 장성을 쌓아 왜놈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전국에 호소하였으며 7월 15일에는 《국공합작을 공포하는 중국공산당의 선언》을 국민당 중앙에 보내였다.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측에 내전의 중지와 국공합작을 호소하는 제안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추진시킨것은 물론 이때가 처음이 아니였다.
일제가 만주를 강점하고 관내에로 침략의 창끝을 돌리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국민당은 공산당을 반대하고 로농홍군을 《토벌》하는데만 열을 올리면서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장개석은 방대한 군사력량을 동원하여 서금에 있는 중앙쏘베트를 없애버리려고 무려 5차례에 걸쳐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국민당은 외적보다 공산당을 오히려 더 적대시하였다.
중국공산당도 당시까지는 항일에 주력을 돌릴수 없었다. 공산당의 주공방향은 토지혁명과 국민당과의 싸움이였다.
외적이 침노하였을 때에는 내전을 일시 중지하고 국민이 힘을 모아 항전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으로 알려져있는 내전과 내분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1930년대중기에 들어섰다.
그후 중국공산당은 대세에 맞게 항일제일주의의 새로운 전략으로 나아갔다. 중국공산주의자들은 《북상항일》의 구호밑에 력사적인 2만5천리장정을 단행하여 섬감녕변구에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하였다. 그후 그들은 《동정항일》로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에 나섰다.
중국공산당은 그후 《반장항일》로부터 《련장항일》로 구호를 바꾸고 국공합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내성있게 노력하였다.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이 노력은 서안사변을 계기로 심화되였으며 중일전쟁이 발발된후 려산에서 진행된 장개석과 주은래의 담판으로써 마침내 그 열매를 다시 얻게 되였다.
나는 려산담판때 주은래가 장개석과 만주와 화북 그리고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활동을 적극화할데 대한 문제를 론의하였다는 위증민의 말을 좋은 감정으로 받아들이였다. 그것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항일전쟁수행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지위를 정당하게 평가하고있으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령도하는 무장투쟁에 큰 기대를 걸고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열망하고있다는것을 의미하고있기때문이였다.
1937년초 모택동은 쏘련의 국제정치잡지 《태평양》에 쓴 《전 중국 구국회성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적극적인 투쟁, 항일주의가 가능하다는 산 실례로 동북에서의 항일유격대활동을 들었다. 그는 동북지방의 항일유격대가 몇해어간의 투쟁에서 10만이상의 적유생력량을 소멸하고 수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줌으로써 중국본토에 대한 일제의 침공을 견제하고 지연시켰다고 썼다. 동북 항일유격대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업적도 포함되여있었다.
위증민과 나는 일제가 씨비리보다 중국본토를 먼저 삼키려고 하는 조건에서 적배후교란의 대부분의 부담은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보다 동만이나 남만의 항일유격부대들이 많이 져야 한다는데 대해서 견해를 같이하였다.
그날 위증민은 의견을 교환하던 과정에 공헌영의 부하가 남경정부 밀사의 자격으로 쏘련경내를 거쳐 2군 지도자들을 찾아왔다고 하면서 만나보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남경정부 밀사가 만주로 온것은 국민당의 남경정부가 동북항일력량과의 합작을 각방으로 모색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공헌영은 왕덕림의 구국군에서 부사령으로 있을 때부터 우리와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였다. 그는 왕년에 우리와 함께 인민혁명군을 창건하는데서도 한몫하였다. 공헌영은 쏘련원동군사령부의 련락을 받고 일부 인원들과 함께 쏘련으로 넘어갔다가 관내로 들어갔다. 관내에서의 그의 활동이 주목할만하였다. 그는 리두, 왕덕림 등과 함께 남경정부와도 련계를 가지고 장학량의 구동북군과도 관계하면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에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동북의용군 총사령으로 임명된 다음에는 남경국민당정부와의 련계밑에 동북지방에서의 항일운동에 대한 외부적지원을 종종 조직하군하였다.공헌영이 우리에게 남경정부의 명의로 밀사를 파견한것은 그가 만주지방의 항일무장투쟁에 여전히 큰 관심을 가지고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밀사도 공헌영과 마찬가지로 동만에서 반일투쟁에 참가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밀사는 관내에서의 투쟁과 동북에서의 투쟁을 하나로 련결시킬 필요를 강조하면서 관내에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로농홍군이 국민혁명군 소속부대들로 개편되여 장개석의 통일적인 지휘밑에 들어가게 되는 조건에서 동북에서의 항일무장부대들의 활동도 남경정부의 총적인 작전적구상속에 포함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관내실정과 동북실정의 구체적차이점과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상대적독자성을 들어가면서 그가 제기한 방안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였다.
남경정부 밀사는 우리 견해가 타당하다는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제기를 철회하였다. 그러면서도 관내와 동북지방의 불가분리적인 련관에 대하여 잊지 말고 호상 밀접한 련계를 가지면서 지지하고 협조해줄것을 그루를 박아서 강조하였다.
우리는 관내투쟁을 돕는 의미에서 동북3성과 조선에서 일제의 배후를 철저히 타격할것을 공약하였다. 밀사는 자기가 쏘련을 경유할 때 중일전쟁과정에 생기는 부상병들의 치료문제를 가지고 그 나라 관계자들과 협의를 하여 도움을 받도록 하였으니 상병자들이 생기면 필요한 때 약속된 통로를 거쳐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미 쏘련에 로약자들을 보낸 전례도 있고 또 자기의 통로를 따로 가지고있었지만 밀사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여 앞으로 그 통로도 함께 리용할것이라고 하였다.
위증민과의 담화를 통하여 나는 중일전쟁과 관련된 전략에서 우리와 중국공산당의 견해가 기본적으로 일치하다는것을 확인하게 되였으며 배후교란작전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게 되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위증민과 헤여진후 우리는 장백-림강현경의 어떤 밋밋한 산릉선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및 병사대회를 가지였다.
회의장소에서 멀지 않은곳에 우물비슷한 수직굴이 있었던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장난군이 그 굴에 돌을 굴려넣었는데 한참만에야 첨벙 하는 소리가 났다. 높은 산릉선 바위틈에 어떻게 그런 굴이 생겨났는지 신비스러웠다.
이 회의에서는 중일전쟁과 관련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략적과제가 상정되고 그것을 집행하기 위한 지휘관, 병사들의 결의가 피력되였다. 오늘 날의 결의모임 같은 회의라고 할가. 백두산밀영과 초수탄에서 열린 회의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한 결의대회였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대회에 대하여서는 혁명력사 전문가들과 저술가들이 글도 많이 썼고 회의에 참가했던 투사들도 여러 기회에 회상하였기때문에 더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백두산회의와 초수탄회의, 지휘관 및 병사대회는 다 중일전쟁에 대처한 우리의 정치군사적대안을 밝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우리는 중일전쟁 첫 시기부터 국내진공작전의 승리를 공고히 하면서 적배후교란작전을 과감히 벌리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로구교사건직후에 장백현 19도구 마순구부근전투와 장백현 13도구 서강성습격전투를 진행하였으며 룡천리 류가동부근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를 벌리였다.
이 시기 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전도》는 우리의 적배후교란작전을 두고 《이것은 확실히 조중 량국민족의 위대한 련합전선의 제일성》이라고 썼다.
이 시기 적배후타격을 위하여 최현네 부대도 장백을 떠나 림강, 통화, 류하, 몽강으로 이동하면서 거듭 전과를 올리였다. 안길과 박장춘도 강건부대와 련합하여 적들을 통쾌하게 족치였다. 김책, 허형식 등이 진행한 해륜원정과 심양철도연선까지 진출한 남만부대들도 적의 배후를 크게 타격하였다. 우리의 무장소부대와 정치공작소조들은 국내 종심깊이에 침투하여 도처에서 적들의 손발을 묶어놓았다. 조선과 만주에서 조중공산주의자들이 벌린 정치군사활동과 치렬한 배후교란작전은 중국의 항일진영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중국을 단숨에 먹어보겠다던 일제의 허망한 꿈은 북중국과 상해계선에서 중국인민들이 벌린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동북지방 항일련군부대들의 적극적인 배후교란작전에 의하여 여지없이 파탄되였다.
《일격론》, 《단기종전론》을 떠들던 일본이 장기전으로 넘어가면서 우리의 적배후교란작전도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다.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관련하여 우리는 림강현 신태자밀영에서 당시까지의 배후교란작전정형을 총화하고 조선국내에서의 배후교란과 적의 군사수송체계, 특히 무기와 탄약 운반을 파탄시킬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시기에 진행된 대표적인 전투가 휘남현성전투이다.
휘남현성은 교통이 발달된 평지의 성시여서 습격하기가 매우 불리하였다. 멀지 않은곳에는 길해선이 있었다. 휘남근처의 여러곳이 적의 《토벌대》의 거점으로 꾸려져있는 조건에서 성시공격에 성공한다 해도 제때에 철수하지 못하면 적증원부대의 추격을 받을수 있었다. 휘남현성진공이 여러모로 보아 불리한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 전투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7련대를 파견하고 새로 편성된 리동학, 최춘국이네 경위련대와 4사의 일부를 참가시킨것은 이 현성이 적배후교란작전의 타격대상으로 적합하였기때문이였다. 휘남현성은 적의 주요《토벌》거점들중 하나였을뿐아니라 그 주변일대 여러 현들에 파견되여 있는 위만군부대들의 후방기지이기도 하였다. 성안에는 두개의 큰 군수품창고가 있었다.
이 현성진공전투에는 항일련군부대들과 함께 반일부대들도 참가하였다.
아군은 불의에 성안에 쳐들어가 적의 군수품창고에서 많은 천과 솜, 식량을 빼앗은 다음 주동적으로 철수하였다. 현성습격전투후 아군부대들은 해룡, 반석, 몽강 등 방면에서 밀려오는 일본군과 위만군의 증원부대들을 다시한번 호되게 타격하였다. 휘남현성전투에 앞서 우리 주력부대가 진행한 무송-서강매복전투도 배후교란작전에서 자못 의의가 컸다. 적배후교란작전의 나날 우리는 리달경, 김영환, 전철산 등 귀중한 전우들을 잃었다.
김영환은 왕청에서 공청사업을 하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사람이다. 우리는 유격구시절에 그를 연길유격대 중대정치지도원으로 파견하였다.
1937년 12월 김영환은 연길땅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철산은 훈춘유격대출신이였다. 우리는 로흑산전투때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후 그는 왕청4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소환되였다. 그에 대해서는 오진우가 잘 안다. 전철산은 1937년 9월에 액목에서 전사하였다.
이 시기 우리는 남만에서 조국광복회 대표로 사업하던 리동광도 잃었다.
유능한 정치일군이였고 용감한 유격대지휘관이였던 그의 희생을 두고 양정우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적의 남만《토벌》작전때 리동광은 통화중심현위가 파괴되였다는 보고를 받고 적의 《토벌》사령부가 있는 고산자를 거쳐 류하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약장사로 가장한채 두명의 호위성원만을 데리고 대낮에 적들이 욱실거리는 고산자거리에 들어섰다.
골목골목에는 리동광을 잡으라는 체포령장이 나붙어있었다. 그 체포령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있었다.
《남만특위 공산비적 두목 리동광 년령 30세 좌우, 키꺽다리, 반고수머리, 눈이 특별히 큼.
이자를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금을 주며 숨기는자는 극형에 처함.》
리동광은 자기에 대한 체포령이 나붙은 게시판에 마주서서 태연히 다 읽어보고서야 여유있게 거리를 떠났다고 한다. 리동광, 리달경, 김택환, 김영환, 전철산의 생애는 자기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헌신적복무의 빛나는 모범이였으며 적배후교란의 자욱을 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의지와 넋을 더운 피로 력사에 아로새긴 고귀한 로정이였다.
내 일생의 총적지향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술로 한생을 살아왔다. 전진도상에 난관이 가로막아나설 때마다 나는 그앞에서 주저앉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에돌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신심을 잃지 않았고 불굴의 의지와 완강한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하였다.
혁명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우리가 주로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술을 써온것은 나 개인의 취미나 성격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시련에 찬 우리 혁명이 제기한 요구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후 세계를 뒤흔드는 복잡한 정국의 소용돌이속에서 우리가 만일 방어나 후퇴, 우회하는 방법에만 매달렸다면 우리앞에 가로놓였던 난국을 타개할수 없었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우리가 그때 역경을 맞받아나가 그것을 순경으로 전환시킨 혁명적전략이 천백번 옳았다고 생각한다.
- 이전글세기와 더불어 18-2. 김주현 15.11.11
- 다음글세기와 더불어 17-7. 혁명적의리에 대한 생각 15.11.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