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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8-4.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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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41회 작성일 15-04-27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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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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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베트로선이 정권건설분야에서의 좌경이였다면 극단적군사민주주의는 군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발로된 좌경적사상경향이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라는것은 군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매개 군인이 상하가 없이 똑같은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의주장을 말한다. 다시말하여 군사행동의 모든 면에서 지나친 평균주의를 추구하며 그것을 절대화하는 사상이다.


유격대오안에 극단적군사민주주의가 존재한다는것을 우리가 처음으로 감촉한것은 남만진출을 끝마치고 왕청에 돌아와서 유격대사업을 지도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때의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편향은 시초적인것으로서 크게 후과를 미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동녕현성전투를 마치고 왕청에 돌아와 유격대의 사업을 료해하는 과정에 우리는 싹에 불과했던 극단적군사민주주의가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군대안의 지휘체계에 침투하여 그것을 마비상태에 빠뜨리고있다는것을 포착하게 되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알리는 첫 경종은 1933년 가을 훈춘현 대황구에서 울리였다.

대황구는 훈춘의 중심유격구로서 국제당파견원 반성위가 박두남에게 피살된곳이다. 바로 여기에서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했던 훈춘유격대의 용사들중 13명이 단꺼번에 무리로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 동만인민들의 비분을 자아냈다.


라자구에서 전투총화를 마치고 유격구에 돌아온 훈춘동무들은 어떤 외딴집에서 잠시 로독을 풀며 추석명절을 쇠였다. 추석을 쇤 다음다음날도 그들은 보초를 세우고 진종일 휴식을 하였다. 그런데 이 비밀을 내탐한 일본수비대가 밤중에 그 외딴집을 포위하고 불의에 달려들었다.


이런 전투정황에서는 적의 약한 고리를 치고 포위환밖으로 재빨리 벗어나는것이 상책이다. 그러자면 지휘관이 정황을 똑똑히 포착하고 제때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대오를 책임진 중대장에게는 결론권이 없었다. 일행중에는 오빈과 같은 유능한 군사지휘관도 있었으나 현당군사책으로 일하다가 좌경바람에 대원으로 강직된 그의 말은 날이 서지 않았다.


그 당시 상급당조직의 지도부에 앉아있던 좌경분자들은 지휘관들에게 군사문제에 대한 결론권을 주지 않았다. 군사작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반드시 회의에서 토의되여야 하며 다수가결의 원칙에 의하여 집체적으로 결정되여야 한다는것이 그들의 주장이였다. 이 주장은 군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그 누구도 어길수 없는 철칙으로 되여 지휘관들의 손발을 꼼짝달싹할수 없게 비끄러매놓았다. 지휘관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한것은 무능의 탓이 아니라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중압으로부터 온 기능마비의 병페였다.


적들이 총대를 꼬나들고 한걸음한걸음 조여드는 죽음의 대문앞에서도 그들은 적과 싸울것인가, 포위를 뚫고 나갈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터무니없는 론의만 거듭하였다. 창발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일부 대원들이 공론만 하다가는 다 망할수 있으니 일단 싸움부터 시작해놓고 보자고 제기하였으나 극단적군사민주주의에 물젖은 사람들은 회의결정도 없이 어떻게 전투를 하는가 하면서 그 제의를 일축해버리였다.


이것은 사실 포위속에 든 유격대를 괴멸에로 이끈 범죄적인 자살행위였다. 토론이 공전을 거듭하는 사이에 적들은 습격을 개시하였다. 그 순간에야 유격대원들은 회의를 중지하고 비로소 싸움을 시작하였다.


비발처럼 날아드는 적탄은 13명의 유격대원들을 전투서렬에서 제거하였다.

시체더미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것은 몇사람뿐이였다. 그중 한사람이 오빈의 유언을 받고 왕청에 찾아와 나에게 13용사의 희생과 관련된 전말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전사한 13명가운데는 백일평도 있고 오빈도 있었다.


훈춘에서 온 대원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시체더미를 헤치고있을 때까지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오빈은 창자가 흘러내리는것도 모르고 마지막숨을 모아쉬며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동무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소. 그러나 당원으로서 부탁하는것이니 오늘의 이 사실을 김일성동지에게 꼭 보고해주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제창자들과 그것을 전투실천에 맹목적으로 적용한 교조주의자들을 저주하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장애가 아니였더라면 훈춘중대동무들은 제때에 포위망을 돌파할수도 있었을것이고 13명의 희생이라는 비참한 상실도 당하지 않았을것이다.


그 13명은 모두가 동녕현성을 치는 싸움에서 우리와 생사를 같이한 잊지 못할 전우들이였다. 우리가 전투를 끝내고 동녕현성에서 철수할 때 방차대에 망라되였던 훈춘동무들은 왕청부대가 싸움을 참 본때있게 하였다고 하면서 앞을 다투어 나의 손을 잡아주었으며 나를 목마에 태워주기도 하고 머리우에 추어올리기도 하였다. 희생된 전우들의 추도식을 할 때에는 엉엉 울면서 추모연설도 하였다.


그처럼 불같은 열정과 사랑을 지닌 사나이들이 하루밤사이에 모두 고인이 되고말았다니 억울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그 13명가운데서도 오빈은 가장 잊지 못할 전우였고 동지였다. 그는 우리가 륙읍지구를 개척하는 과정에 채수항의 소개로 친교를 맺은 사람이였다. 채수항이 룡정에서 대성중학교를 다닐 때 오빈은 거기서 동흥중학교를 다니였다. 이 두 학교는 다 사회운동자들과 독립운동인재들을 키워낸 중요한 온상이였다. 그들은 룡정에 있을 때 학생운동도 함께 하였다.


오빈은 채수항과 함께 우리가 주최한 공수덕회의와 겨울명월구회의에도 참석하여 무장투쟁방침을 세우기 위한 문제토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오빈과 채수항이 나를 종성으로 안내한것이 아마 1931년 5월일것이다. 종성은 채수항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그들과 함께 밀선으로 두만강을 건너 신흥촌이라는곳에 첫자욱을 짚던 때가 어제런듯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는 버들방천을 물들이는 신록의 아름다움과 고색창연한 옛성터의 정취를 가슴설레이는 격정속에 받아들이며 조국의 미래를 두고 많은 말을 나누었다.


나는 그해 봄에 신흥촌 북문밖에서 종성반제동맹책임자로 일하는 오빈의 아버지 오의선도 만나보았다. 연길현 차조구라는곳에서 소작살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아들이 직업적인 혁명활동의 길에 나선후 가족을 데리고 신흥촌으로 이사하였다. 오의선의 집은 미구에 왕청지구의 반일인민유격대와 종성군안의 모든 지하혁명조직들과의 련계를 지어주는 비밀련락처로 되였다.


내가 신흥촌에 갈 때마다 오빈의 집에서는 국수를 누르군하였다. 우리는 1933년 5월단오도 이 집에서 쇠였다. 그때 오의선은 30리나되는 풍계장에까지 가서 메밀가루를 사다 평양랭면맛이 나는 국수를 눌러 우리의 점심상에 놓아주었다.


그 단오날의 인상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우리가 물고생을 많이 하는 오의선의 가족을 위해 그 집 뜨락에서 샘줄기를 찾아주고 박우물을 만들어주던 일이다. 나는 그때 훈춘땅에서 무장투쟁에 전심하고있는 오빈을 대신하여 아들된 심정으로 부지런히 삽질을 하였다.


동녕현성전투를 앞두고 라자구에서 오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에게 5월단오날 신흥촌의 아버지가 눌러주던 메밀국수이야기를 하였다. 오빈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못내 흐뭇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훈춘땅에서 군사책으로 활동하다가 대원으로 강직된 때였지만 그는 조금도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해하지 않았다.

내가 락심하지 말라고 오빈을 고무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다싶이 나는 이렇게 생기발랄한 인간으로 남아있소. 군사책이 대원으로 된다고 해서 오빈이 김빈이나 박빈이 될수야 없지. 그렇지만 훈춘에서는 더 일하고싶은 생각이 없소. 동녕현성전투나 끝나면 상급에 제기해서 왕청으로 갈가 하고 궁리하는데 대장동무의 의견은 어떻소?》

《오빈이 왕청에 오면야 나도 좋지. 그렇지만 오빈에게 〈민생단〉감투를 씌울수 있는 좌경분자들은 왕청에도 얼마든지 있다는걸 알아야지.》

나의 대답이였다.

《그럴가?》

《왕청이라고 해서 좌경바람이 약한것은 아니요.》

《그래두 대장동무의 곁에 가있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것 같구만. 하여튼 나는 왕청으로 가고야말겠소. 오빈은 일구이언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오빈은 서산포대를 점령할 때 작탄을 품고 앞장에서 용감하게 돌격로를 헤쳐나갔다. 그의 이 공적은 전투총화에서 응당 높은 평가를 받았다.

총화를 끝내고 부대들이 라자구에서 서로 갈라질 때에도 오빈은 자기의 결심을 재차 표명하였다. 왕청에 오려는 그의 결심은 확고부동한것이였다. 그는 동녕현성전투때 왕청동무들이 서산포대를 점령하고 성시로 쳐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결심이 더 굳어졌다고 말하였다.


물론 나는 협력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도전에 오빈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왕청으로 날아온것이다. 봄에는 리광이 갔고 여름에는 반성위가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졌으며 오늘은 오빈이 그렇게도 바라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두번다시 돌아올수 없는 세상으로 가버린것이다.


오빈을 포함한 13용사의 최후에 대한 비통한 소식은 나에게 청천벽력같은 충격을 주었다. 나는 그 최후를 알게 된 다음부터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전률에 가까운 감정으로 역겹게 대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나 그런 요소가 대내에 존재하는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처럼 큰 혐오감과 경계심을 가지고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반대한것은 그것이 혁명실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백해무익한 사상경향이라는데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군사작전과 관련되는 모든 문제를 당조직에서 토의하는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고있으며 대중의 창발적인 의견이 당조직을 통하여 군사작전수립에 반영되는것을 환영하고있다. 그러나 그런 집체성이 부대관리를 책임진 지휘관의 권한을 침해하는것은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항일전쟁초시기의 극단적군사민주주의는 집체성의 명목밑에 지휘관의 권한을 침범하였으며 부대관리와 군사작전에서 지휘체계를 마비시키였다.

그 당시 군대안에서는 군사작전을 세우거나 전투를 할 때 당원들의 창발성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소조회의, 지부회의,각급위원회를 비롯한 당회의도 열고 오늘날의 군인총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전대회의도 열었다. 그것도 정황조건을 고려한다는 원칙에서였다.


그런데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나뽈레옹법전처럼 절대시하고있던 좌경분자들은 모든 군사문제는 그 대소와 정황조건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각급 당조직과 전대회의들에서 토의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령 혁명군이 어느 한 도시를 칠 계획이라면 먼저 당소조회의를 진행한다. 진공할 도시의 이름은 비밀에 붙이고 그 도시형태를 략도에 그려놓은 다음 이 성시를 공격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들이치겠는가 하는것을 먼저 토의결정한다.

소조회의에서 전투를 해야 할 필요성과 승리할 가능성이 인정되고 구체적인 작전방안이 서게 되면 또 지부총회에서 동일한 문제를 놓고 꼭같은 방식으로 토의를 반복하며 그 방안을 거수가결로 결정한다.


다음공정은 전대회의이다. 전대회의에서 토의되는 내용과 순차도 소조회의나 지부총회와 다름이 없다. 좀 다른것이 있다면 비당원군인들도 문제토의에 참가할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ㄱ라는 도시를 치려 한다, 이 도시를 치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많은것을 해결할수 있다, 손실은 없을것이고 희생은 적을것이다, 작전계획은 여사여사하다, 이 계획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길수 있다는 식으로 결정을 채택한다. 그러면 전투명령을 하달하고 ㄱ도시로 진격해간다.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갑작스레 의제를 설정해놓고 여럿이 모여앉아 필요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에는 하자 하지 말자, 된다 안된다, 이길수 있다 없다는 식으로 끝없는 론쟁이 펼쳐지군하였다.

군사민주주의의 덕으로 모두가 평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개개명창이 되여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론쟁은 무한정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에 적정에는 변화가 생기고 각급 회의들에서 모처럼 토의결정된 작전방안은 무용지물이 되군하였다. 설사 그 방안대로 싸움을 하는 경우에도 혁명군은 정황조건의 변화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당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13용사의 희생을 가져온 대황구사건은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다른 하나의 표현은 혁명군대안에서 민주주의를 코에 걸고 지나친 평등주의와 평균주의를 부르짖는것이였다.

이런 표현은 우리가 관할하는 부대에도 없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현당군사책 김명균과 함께 1중대의 사업을 료해해보려고 병실로 찾아갔다. 그날 병실주변에서는 중대장이 비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있었고 한쪽구석에서는 중대정치지도원이 대원들과 함께 나무를 패고있었다.

상하일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 광경앞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김명균군사책은 웬일인지 얼굴빛이 랭담하였다.

《지휘관들이 저렇게 이신작칙을 하니 눈맛도 좋구만.》

내가 이런 말을 해도 군사책은 여전히 댕댕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였다.

《이왕이면 우리도 저 사람들과 같이 마당을 쓸어봅시다.》

나는 마당 한쪽구석에 나딩구는 비자루를 잡으려고 병실쪽으로 향하였다.

그러자 김명균은 나의 군복소매를 뒤로 슬그머니 잡아끌었다.

《내 이제 기막힌 장면을 하나 보여주겠소.》

그는 풍기사령에게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을 곧 불러오라고 명령하였다.

풍기사령은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지금은 아침 청소시간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불러오라면 불러올게지 무슨 잔말이요!》

군사책의 입에서는 대뜸 욕지거리가 튀여나왔다.

풍기사령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이 전대회의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나는 풍기사령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고 김명균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중대장이나 정치지도원도 인격상으로 대원들과 동등하니 대원들이 청소를 할 때에는 상관도 만사를 제쳐놓고 청소를 해야 한다는거라우.》


이것은 아직 극단적군사민주주의가 시초단계에 있을 때였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 평등사상은 그후 유격대의 군사실천에까지 부식되여 일정한 기간 그 지휘체계를 마비시켜놓았다.


물론 모든 사람, 모든 군인은 인격상으로 평등하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항일유격대나 오늘날의 인민군대와 같은 혁명군대에서는 매개 군인들에게 그가 수행하는 임무에 따라 서로 다른 분공을 주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중대장의 분공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대장의 모자를 씌우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분대장의 일을 시킨다.

수행하는 임무와 분공에 따라 혁명군대안에는 상하관계가 있게 된다.

중대장은 소대장의 상급으로 되고 소대장은 분대장의 상급으로 되며 분대장은 대원들의 상급으로 된다. 혁명군대의 군사복무조례는 하급은 상급의 명령지시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규제하고있다. 이것이 없이는 군대를 지휘통솔할수 없고 군대의 강철같은 규률을 유지할수 없다.


항일유격대의 복무조례는 군인집단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였으며 지휘관들이 그 복무조례를 자각적으로 지키도록 요구하였다.

그런데 좌경기회주의자들은 항일유격대의 복무조례에 규제되여있는 상하관계를 무시하는데로 나아갔다. 이것은 규률과 질서, 관병일치를 생명으로 하는 항일유격대의 생리를 파괴하고 그 도덕적기초를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빚어냈다.


극단적평등주의는 군대내에서 극단적군사민주주의로 나타나 평등의 구호밑에 하급이 자기가 추대한 상급을 존경하지 않고 반말질을 하거나 상급이 준 명령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시비질하는 불미스러운 작태까지 뱉아놓았다.

하급이 상급에 인사도 하지 않고 반말질을 하거나 상급이 내린 명령지시를 놓고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벌써 군대가 아니라 오합지졸의 무리이다. 그런 군대에서 전사는 지휘관을 위해 방패가 되고 지휘관은 전사를 위해 육탄이 되는 고결한 동지애와 사상의지의 화합을 감히 바랄수나 있겠는가. 자기 대오를 만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하고 한걸음으로 걸으며 한숨결로 호흡하는 그런 강철같은 통일체로 꾸릴수 있겠는가.


극단적군사민주주의는 전투시에 지휘관이 대원들과 꼭같은 행동을 할것을 요구하는데서도 나타났다. 소뿔도 각각 념주도 몫몫이라는 말은 무슨 일에나 다 각자의 차지가 있다는것을 보여주는 단순한 리치이다. 이 리치대로 해석하면 전투마당에서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고 대원들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것으로 된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간단한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군사민주주의자들은 지휘관들을 향하여 돌격할 때에는 돌격서렬의 앞장에 서고 방어할 때에는 방어진의 1선에 서서 생사를 가리지 말고 싸우라고 설교하였다. 이런 요구는 지휘관들로 하여금 전투장에서 자기의 직무를 제대로 실행할수 없게 하였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전투정황을 부단히 살피면서 싸움을 광폭적으로 지휘해야 할 사람들이 1선에 서서 대원들과 함께 움직이다나니 부대를 정황에 맞게 제대로 통솔할수 없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지휘관이 선봉에 서서 대원들을 돌격에로 이끌 때도 있고 적탄이 작렬하는 참호와 전호들을 돌아다니며 전투원들을 고무할 때도 있다. 부대가 역경에 처하고 그것을 순경으로 바꾸어야 할 지휘관의 선구적인 모범이 필요할 때에는 응당 제 1선위치에서 대원들을 원쑤격멸에로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정황에 관계없이 아무때나 그런 식으로 하는것이 곧 이신작칙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전투총화들에서는 자기의 지휘처를 리탈하여 돌격서렬의 앞장에서 대원들과 꼭같이 행동한 지휘관들에게 노상 칭찬이 차례지군하였다. 대원들은 어느 소대장이 고지우에 꿋꿋이 서서 전투를 지휘하는데 총알이 날아와도 꿈만해한다거니, 아무 중대장은 적진으로 돌입할 때에도 대원들보다 장바 한기장쯤은 앞서 들어간다거니, 우리 대대장만큼 적진속에 뛰여들어가 용감하게 육박전을 하는 대대장은 없을것이라느니 하면서 경쟁적으로 자기네 상관을 추어올리였다.


전투규정이 밝히고있는 위치에서 전투발전전반을 정확히 통찰하고 부대의 차후 행동방향을 결심해야 할 소대장, 중대장,대대장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 필마단창으로 적진속에 깊숙이 들어가는 무모한 풍조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동만의 모든 유격대들에 다 전파되였다. 항일전쟁초기 유격대들에서 소대장, 중대장과 같은 기본단위의 군사지휘관들이 많이 희생된것은 이런 풍조때문이기도 하다.


왕청에서도 필마단창의 명수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김철, 김성현,리응만 등은 다 그런 명수들이였다. 김철과 김성현은 선두에서 돌진하다가 전사하였고 리응만도 전위에서 싸우다가 발목을 상하였다.


연길의 최현과 조도언은 전 동만이 다 아는 돌격명수들이였다. 그들은 정찰도 대원들을 시키지 않고 자기네가 직접 하였다. 군사지휘관들이라기보다 중학생들처럼 물덤벙불덤벙하는 천진란만한 모험가들이였다.


조도언은 연길유격대가 낳은 유명한 모험가였다. 입나발을 잘 분다고 연길지방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를 《조나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러왔다.

그는 어디 가서나 이 별명때문에 군중의 이목을 끄는 인물로 되였다.


사람들은 조도언이 입나발을 끊은지 오랜 성년시절은 말할것도 없고 백발이 다된 말년까지도 그를 본명대신 《조나발》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항일전쟁의 포연탄우를 늘 앞장서서 헤쳐온 투사 조도언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조나발》이라고 불러왔기때문에 그는 자기를 별명대신 본명대로 조도언이라고 부르면 오히려 이상해하거나 서운하게 생각할 지경이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 집 문밖에 와서 《이 집이 조도언동지댁입니까?》하고 물은적이 있다.

그때 조도언은 푸접없다고 할만치 퉁명스럽게 《이 집에 〈조나발〉은 있어두 조도언이란 사람은 없어. 여긴 〈조나발〉의 집이야.》하는 대답을 하여 손님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처럼 그는 항일전쟁시기의 전우들이 지어준 자기 별명을 이만저만 사랑하지 않았다.

조도언이 만일 고인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나도 이 글에서 이름대신 대중이 그렇게도 즐겨 부르던 별명을 써가며 그를 회고하고싶다.


자기 부모의 이름자도 변변히 쓸줄 모르던 조도언은 더벅머리총각이 다된 때에야 야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조선말자모를 익히고 구구표와 《유년필독》을 배웠다. 그는 문맹의 뒤골목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조직생활도 하고 유격대에도 입대하였는데 나중에는 중대장의 중임까지 맡아보았다.


조도언은 중대장이 된 다음에도 적의 포대앞에까지 들어가서 직접 적정을 살펴보고 중대에 다시 돌아와서는 습격명령을 하달하고 선두에서 바람처럼 내달리군하는 유별난 싸움군이였다.

좌경분자들은 조도언이 백주에 적을 정찰하고 자위단을 쳐서 단꺼번에 여러자루의 무기를 로획하자 각종 집회와 공식문건을 통해서 그의 무훈을 굉장히 선전하였다. 그런데 그 선전은 조도언이 그런 모험을 삼가해야 할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면적인것이였다. 어쨌든 그런 선전으로 하여 조도언은 온 동만이 거의 다 아는 싸움군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였다.


그는 대전자전투때에도 대오의 앞코숭이에서 기관총좌지를 향해 돌진하다가 치명상을 당하였다. 기관총앞으로 얼마나 바싹 접근했던지 적탄은 배를 뚫고 비스듬히 잔등을 관통하였다. 조도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이때의 부상으로 하여 그는 6년동안이나 병원생활을 하였다. 종당에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중대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가 병상에서 지낸것은 항일무장투쟁이 대부대활동으로 전환되여 남북만주와 국내에로 판도를 넓히면서 승승장구해가던 때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전설적존재로 되였고 그 혁명군의 정의로운 투쟁은 전세계 피압박인민들에게 광명을 주는 등불로 되였다. 항일전쟁은 새로운 사단들과 련대들을 지휘할 유능한 군사인재들과 백전로장들을 요구하였다. 조도언이 만일 전투능력을 상실한 전상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항일전쟁이 가장 눈부신 앙양기를 걷고있던 때에 이루 헤아릴수 없는 무공을 쌓아올렸을것이다.


군대내에서 극단적군사민주주의가 시정될 때까지 좌경분자들은 지휘관들의 신변안전 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후에 가서야 련대와 사단들에 지휘관들의 호위임무를 담당하는 경위대를 조직하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는 또한 혁명군대의 상벌적용에서 평균주의로도 표현되였다.

항일유격대에서는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상벌제도를 설정하였다. 전투와 훈련, 일상생활에서 모범을 보인 군인들에게는 상을 주고 복무조례를 엄중히 위반한 군인들에게는 벌을 주었다. 상도 공로의 크기에 따라 여러가지로 정하였고 벌도 과오의 경중에 따라 여러가지로 주었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어째서 아무개한테는 1등상을 주는데 같은 분대에서 같은 임무를 수행한 아무개한테는 2등상을 주는가, 아무 동무한테는 주의처분을 하면서 같은 과오를 범한 아무개한테는 왜 경고책벌을 주는가고 시비하였으며 상벌적용에서 평균주의를 실시하도록 여론을 조성하거나 압력을 가하였다.


이것은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려는 신상필벌의 근본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초현실주의적인 립장이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극단적군사민주주의는 항일유격대의 군사정치도덕적우월성을 부단히 발양시키며 항일무장투쟁을 계속 승리적으로 전진시키려는 우리의 지향과 노력에 제동을 거는 유해로운 사상경향이였다.


이런 사상경향을 제때에 청산하지 않는다면 항일유격대의 모든 지휘관들은 조만간에 허수아비가 될것이고 유격대는 상하관계도 없고 관병의 계선도 없는 무법천지의 집단으로 될것이며 기필코 내부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하게 될것이였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는 그 표현형태가 어떻든지간에 소부르죠아사상에 바탕을 둔 기회주의적인 사상경향이였다. 이것은 사실상 일종의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으로서 로동계급의 혁명사상과는 인연이 없는것이였다.


소부르죠아사상의 반영으로서의 무정부주의는 일반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 특수적으로 부르죠아지의 정치적권력에 대한 반발에 그 리념적바탕을 두고있는것으로서 극단한 민주주의와 자유, 방종을 찬양하면서 사회에 무정부적혼란과 무절제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자본주의적대생산과 부르죠아지의 정치적독재의 중압밑에서 경제적으로 파산되고 정치적으로 무권리한 소부르죠아계층의 불안한 심리를 체현한 일부 극단적인 사상가들은 자본가계급의 정치적권력을 폭력적으로 타파하고 거기에 무정부주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권력일반을 반대하는데로 대중을 이끌려하였다.


프랑스의 소부르죠아사상가인 프루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로씨야의 바꾸닌이나 크로뽀뜨낀 같은 무정부주의사상가들의 정치적권력에 대한 극단한 증오, 사회적평등에 대한 무분별한 요구로 표현된 이른바 무정부주의적리론은 근로인민대중을 자본의 억압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없게 하며 착취계급의 독재를 타도한 나라들에서는 혁명의 전취물을 지켜낼수 없게 하고 진실로 인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새 제도, 새 생활을 꾸릴수 없게 하는 백해무익한 사상조류로서 엄정한 력사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사상경향은 얼마동안 소부르죠아계층속에서 극단한 민주주의와 무제한한 자유에 대한 환상을 조성시키였고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대공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소부르죠아적, 농민적사상근성이 지배적인 지역과 나라들에서 일정한 파급을 보게 되였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무정부주의가 일정한 몫이라도 차지하고있는것처럼 생각하게 된 주요한 리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로동계급의 당들가운데는 지주, 부르죠아지의 반동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에 무정부주의세력을 끌어들인 당도 있었다. 쏘베트정권이 공민전쟁시기 우크라이나의 무정부주의집단인 마흐노일당과의 합작을 실현했던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항일유격대내부에 극단적군사민주주의가 대두했던 초기만해도 무정부주의적경향은 일정한 사회계층, 특히는 소부르죠아계층의 혁명성을 과시하는 일종의 정치리념으로 남아 로동계급의 혁명리론과 혁명실천에 무시할수 없는 해독을 끼치고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극단적민주주의가 무정부주의적경향으로만 나타나는것은 아니다. 국제로동운동안에서 나타났던 수정주의자들의 행동 역시 극단적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허울밑에 부르죠아 자유주의와 무정부주의, 무절제,무질서를 조장시키고 사회적혼란과 방종을 야기시킨다. 이런 리치를 념두에 둘 때 우리는 극단적부르죠아민주주의와 무정부주의사이에는 사상적공통성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수 없다.


극단적민주주의가 군사분야에 침습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혼란을 낳게 된다.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제때에 청산하지 않는다면 유격대건설과 군사작전에 예상치 않은 후과를 미칠수 있었고 전반적혁명운동발전에 적지 않은 지장을 줄수 있었다.


우리가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청산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그와의 투쟁을 하고있을 때 십리평에서는 유격구창설후 1년반의 사업을 총화하고 적의 대《토벌》에 대처한 유격구방위대책을 세우기 위한 동만유격대 지휘관들과 정치위원들의 회의가 소집되였다.

나는 이 회의에서 김일룡과 김정룡을 만났다. 김일룡은 안도유격대 대장이였고 김정룡은 정치위원이였다. 화룡현에서는 유격대 장대장과 정치위원 차룡덕이 왔고 연길현에서는 유격대 총대대장 주진, 대장 박동근, 정치위원 박길이 왔다. 훈춘동무들도 참가하였는데 누구누구였던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 회의에서는 부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극복할데 대한 문제도 토의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오안에서 부대지휘의 기본은 지휘관의 결심이고 엄정한 중앙집권적규률과 질서를 확립하는것이며 부대지휘관리방법은 정치사업을 앞세우는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부대안에는 상하관계의 구별이 명백하고 무조건적이여야 하며 지휘관은 상부의 명령집행에서 견결하고 적극적이여야 하며 일단 채택한 결심은 철저히 관철하여야 한다.


지휘관은 언제나 주동적으로 지휘를 하며 복잡하고 어려운 정황앞에서 동요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결단성있게 행동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지휘관이 지휘에서 주관주의와 독단을 부려도 된다는것은 아니다. 지휘관은 상급의 명령집행과 전투지휘에서 대중의 힘과 지혜에 의거할줄 알아야 한다.

지휘관은 명령 하나만으로 부대를 지휘하지 말고 정치사업을 앞세워 대원들의 자각적열의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오늘의 전쟁은 필마단창으로 승패를 겨루던 노예소유자시기나 봉건시기의 전쟁이 아니라 군대와 인민이 한덩어리가 되여 싸우는 현대적인 인민전쟁이다. 싸움의 승패는 누가 군민의 열정과 창조적적극성을 더 훌륭히 발양시키는가 하는데 있다. 군민의 열정과 창조성을 계발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사업을 앞세워야 한다. 당회의, 전대회의,선동원의 해설선전 등은 다 정치사업을 위한 위력한 수단으로 된다. 그러므로 지휘관들은 이 수단을 잘 리용하여야 한다.…

내가 그때 회의에서 강조한 내용은 이런것이였다.


나는 훈춘유격대가 대황구에서 범한 과오를 비판하고 13용사의 희생을 초래한 극단적군사민주주의의 해독성을 두고 각 현 유격대 대표들에게 경종을 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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