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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0-1. 사나운 회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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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991회 작성일 15-05-14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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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 사나운 회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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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나날들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던 중중첩첩한 설령들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피와 고뇌로 얼룩진 원정은 승리적으로 종결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는 그 승리에 기초하여 혁명을 심화시킬수 있는 새로운 전망이 열리였다. 병마에 지친 몸을 끌고 로야령산정에 오른 나는 대원들과 함께 왕청의 산발들을 굽어보며 환성을 올렸다. 수개월동안 초연과 혹한속에서 겹쌓인 피곤이 순간에 다 가셔지고 고향의 뒤동산에라도 와닿은것 같은 희열로 마음마저 구름처럼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왕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며칠동안 침상에서 고열과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원정에서 얻은 촉한의 후유증이 또다시 나를 쓰러뜨리였던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숙반》바람에 유격구가 만신창이 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의 침상에까지 날아들어왔다. 《간호병》들도 유격구를 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좌경분자들의 죄상을 분노에 차서 고발하는것이였다.


몇달전까지만 하여도 혁명을 하느라고 왕청골안이 좁다하게 뛰여다니던 당원들과 공청원들, 부녀회원들이 광란적인 살인각본의 작성자들과 그 집행자들에게 저주를 보내며 자기자신들이 피로써 개척하고 사수해온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가는것 같은 전률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우주의 모든 움직임이 한순간에 죄다 정지되고 세상만물이 빙하에 짓눌려 종말을 고하는것 같은 무서운 절망과 좌절감을 느끼였다.


라자구등판에서 겪은 시련이 크다고 하지만 여기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수 있다. 16명밖에 안되는 대오를 이끌고 촉한에 걸린 몸으로 천교령을 넘을 때의 난관 역시 모진것이기는 하였으나 《민생단》문제때문에 당해야 했던 고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때에는 원정대의 앞길을 막아서던 장애가 명백하였다. 그 장애란 바로 추격하는 적과 나의 촉한이였다. 우리는 김로인과 같은 귀인의 도움으로 적의 봉쇄를 돌파하였고 조택주로인과 같은 은인의 덕으로 아사, 동사,병사의 함정에서도 벗어날수 있었다. 인민이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준것이다.


그런데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에서는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고있었다. 타도하는 사람들과 타도당하는 사람들사이에 모순이나 대립 같은것은 있을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도하는 사람들은 타도당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혁명대오에서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 《숙반》의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지난날 혁명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바쳐온 검열된 투사들이였다.


그렇다면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이 해괴망측한 《소탕전》에서 적아를 식별해낼수 있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는것이다. 누구를 적으로 보고 누구를 우리편으로 보아야 하는가. 《숙반》지도부는 자기들이 처형한 수백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모두 적이라는 락인을 찍었는데 이런 판결을 합당하다고 보겠는가. 만일 그 판결이 합당치 않은것이라면 《숙반》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반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수백수천명 혁명가들의 출혈로 무섭게 비틀거리는 동만의 현실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제기하고있던 물음이였다.

나는 몸도 마음도 다 고통으로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요영구에는 나를 병마에서 건져줄만한 명의도 없었고 신통한 약재도 없었다. 그저 민간료법을 좀 알고있는 대원들이 교대로 내 머리맡에 앉아 찬물찜질을 하느라고 있는 성의를 다할뿐이였다.


소북구마을사람들은 내 병을 념려하여 꿀과 노루피를 보내주었다. 중국로인들도 차를 끓여가지고 와서 문병을 하였다. 김사령이 건강해야 유격구도 고수하고 항일도 할수 있다고 하면서 유격대원들에게 간호를 잘해드리라고 부탁하였다.


꿀도 차도 노루피도 보양제로서는 나무랄데 없는것이였지만 나는 그 모든 음식물들과 약재들을 원정에서 돌아와 병고에 시달리고있는 전우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중에는 독감환자도 있었고 동상자도 있었으며 대장염이나 기관지염에 걸려 고통받는 대원들도 있었다.


어느날 나는 오한을 무릅쓰고 송갑룡의 부축을 받으며 병상에 누워있는 대원들을 찾아갔다. 그때 내 눈을 제일 아프게 자극한것은 원정에 참가했던 전우들의 볼품없는 옷차림이였다. 초연에 그슬리고 총탄에 찢겨진 그들의 군복마다에는 전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온 겨울 혹한속에서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재봉대에 전령병을 파견하였다. 그전해 가을 북만으로 원정을 떠날 때 전문진에게 다음해에 입을 부대의 여름옷을 미리 지어놓으라는 과업을 맡기고 갔었는데 그 과제가 수행되였다면 원정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입힐수 있는것으로 먼저 스무벌쯤 골라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 당시 재봉대는 다홍왜에서 멀리 떨어진 솔밭골의 밀림속에 자리잡고있었다. 성원이라고 해야 전문진과 한성희를 비롯한 몇사람밖에 없었다. 전문진이 동녕현에서 양재기술을 조금 배우다가 나온 구대원이라면 한성희는 요영구에서 아동단사업을 하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신대원이였다.


전령병과 함께 군복을 지고 요영구로 달려온것은 전문진이 아니라 몇달째 북만에 간 원정대를 기다리며 외진 섬이나 다름없는 솔밭골의 수림속에서 임신중에 있는 그를 정성껏 간호하고있던 한성희였다. 한성희는 앓아누워있는 나를 보자 눈물부터 쭈르르 흘리였다.


그가 지고 온 군복들을 원정대원들에게 갈아입힌 다음 나는 한성희를 재봉대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솔밭골로 돌아간줄로만 알았던 한성희가 다음날 아침 잣죽이 얹혀있는 밥상을 들고 내앞에 다시금 천연스레 나타났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옥봉동무, 어떻게 또 여기에 나타났소? 무슨 일이 생겼소?》


옥봉이란 한성희의 아명이였다. 그는 한영숙이라는 별명도 가지고있었다. 한성희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였다.

《장군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어제 솔밭골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성희의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아동단시절이나 입대후나 그는 상급의 명령지시에 불복한적이 단 한번도 없는 충실하고 순박하고 고지식한 녀성이였다. 그가 나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변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몸져누워계시는데 제가 돌아간들 문진언니가 좋아하겠습니까.》

나를 걱정하는 한성희의 그 웅심깊은 마음은 물론 고마운것이였다.

나는 좁쌀과 미역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한성희의 배낭속에 넣어주며 그를 달래였다.

《여기에 나를 돌봐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동무는 내걱정을 말고 오늘중으로 당장 솔밭골에 돌아가야 하오. 동무가 가지 않으면 전문진이는 어떻게 하오? 지금이 바로 막달이라고 하는데 혼자서야 해산을 할수 없지 않소.》

《장군님, 다른 명령만은 다 집행하겠지만 이 명령만은… 간호를 해드리지 못하고 재봉대로 돌아가면 문진언니가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장군님, 저의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장군님께서 제일 급한 대목을 넘기고계시는 때에 녀대원들이 한명도 없다니 말이 됩니까.》

한성희는 오히려 나를 설복하느라고 열을 올리였다.

《성희동무, 부탁이니 어서 돌아가서 문진동무를 간호해주오.》

그때 리효석중대장이 한성희를 곤경에서 구원해주었다.

《대장동지, 한성희가 가도 산파구실은 하지 못합니다. 아이도 못낳아 본 처녀가 어떻게 해산방조를 합니까.》

경험있는 녀자를 물색하여 보내겠다는 중대장의 말에 나는 그만 굽어들고말았다.


한성희는 그날부터 주야로 나를 간호하여주었다. 그는 끼니마다 밥상에 잣죽을 놓아주군하였다. 아마 그의 주문을 받고 4중대 대원들이 요영구의 수림속에 들어가 눈속에 파묻힌 잣송이들을 주어온 모양이였다. 중대장자신도 막대기를 들고 아침마다 잣사냥을 떠나군하였다.


한성희는 자기가 간호를 잘못해서 장군님의 몸을 추세우지 못한다면 조선사람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밤잠도 자지 않고 극성스레 나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언제였던지 그가 자기의 머리태를 잘라 나의 신발바닥에 깔아준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하나의 사실을 보고 한성희가 정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살마저도 서슴없이 떼주는 그런 형의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피줄이란 역시 속일수 없는것이였다.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도 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


한성희네 두 자매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기 위하여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두 딸이 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는 누가 모시고 가정은 누가 돌보느냐 하는 문제가 불쑥 튀여나오는 바람에 자매간에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한성희는 입대적격자가 못된다는데로부터 매번 수세에 몰리군하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날 숙보면 안돼. 언니가 하는 일은 나두 다하지 않니. 키두 언니만치는 크단 말이야.》

한성희가 이런 말로 맵짜게 공격을 들이대면 언니는 언니대로 여유작작하게 반공격을 가해오군하였다.

《키는 커두 젖비린내야 어디 가겠니.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구 했다. 너는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동단생활이나 잘하여라.》

그 어느쪽도 상대방에게 참군의 영예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딸들이 이불밑에서 자신들의 장래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론의를 하고있을 때 그 대화의 한토막을 우연히 엿듣게 된 한성희의 어머니는 자기가 입고 다니던 단벌무명치마를 뜯어 밤을 새워가며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두개의 배낭을 만들었다. 다음날에는 그 배낭들에 미시가루를 듬뿍듬뿍 닦아넣었다. 그 두 배낭이 자기들이 지고 가게 될 행장이며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꾸려줄수 있는 지참품과 같은 물건이라는것을 한성희네 자매가 알게 된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였다.


그날 한성희의 어머니는 두 딸을 앉혀놓고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봉양을 바라지 않는다. 나라도 찾지 못한 주제에 효도가 다 무어냐. 너희들이 이 에미를 돌보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둘 다 이달음으로 유격대에 들어가거라!》

《어머니!》

두 자매는 울음을 터치며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그들은 가슴을 치는 맹약과 눈물로써 어머니를 하직하였다. 1934년 봄에 우리는 한성희를 지휘부직속 재봉대로 소환하였다.


그는 전도가 촉망되는 녀대원이였다.

성격상 약점이 있다면 만사를 너무 태평스럽게 대하는것이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녀성으로서는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군인으로서는 놀랍다고 할만치 량순하고 무경각하였다. 이 무경각성때문에 한성희는 결국 적들에게 붙잡혀 혁명을 중도반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본대로 찾아오라는 나의 지령을 받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던 그는 녕안현 이도하자의 수림속에서 적들의 포위속에 들었다. 수십명의 위만군병사들이 총대를 꼬나들고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줄도 모르고 어린 녀대원은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에서 머리를 감고있었다. 우리가 무송지구에 진출하여 새 사단을 조직하고있을 때 체포된 그는 라자구에서 적들의 문초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수인들을 지키고있던 보초들중에는 한성희를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정한 량심적인 조선인 보초도 있었다. 그는 혁명을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귀순문서장에 도장을 찍고 매일매일을 치욕스럽게 살아가던 사람이였다. 교형리들이 한성희를 죽이려한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보초는 그 녀자에게 탈출을 건의하였다. 자기도 총을 벗어던지겠으니 함께 도주하여 조선으로 나가든가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초막이나 치고 생활하는것이 어떤가고 하였다. 한성희는 그에 동의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적의 소굴을 감쪽같이 탈출하였다. 그 조선인보초는 후날 그의 남편이 되였다.


한성희가 적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것을 다같이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어떤 녀대원들은 너무 분해서 밥도 먹지 않았다. 친동생처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던 전우를 잃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한성희의 금새를 잘 알고있는 왕청시절의 투사들은 지금도 그를 아름답게 추억하고있다.


한성희의 자식들이 어머니의 경력을 두고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도 다른 투사어머니들처럼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빨찌산대오에 서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물론 한성희가 적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더라면 더 좋았을것이다.

하지만 혁명이란 탄탄대로가 아니다. 출발신호만 울리면 누구나 쾌속으로 뛰여가 쉽사리 결승선에 도달할수 있는 100메터경기 같은것은 더욱 아니다.

성공과 실패, 전진과 후퇴, 앙양과 좌절의 부단한 교차와 반복속에서 승리를 향해 달리는 끝없는 행로가 바로 혁명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 장구한 행로에 무슨 곡절인들 없겠는가.


자식들이 부모들을 원망할 때마다 한성희는 이런 말로 그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의 경력가운데 오점이 좀 있다고 너희들까지 고민할것은 없다. 조선로동당은 부모의 잘못을 가지고 자식들을 허물하지 않는다. 부모가 지은 죄를 자식들이 책임질수 없다는것이 바로 우리 수령님의 정치이다. 문제는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수령님께 충성을 다하거라.》


나는 한성희가 자식들을 옳게 교양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당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간직한 성실하고 결백한 녀성이였다.

한성희가 쑤어준 그 잣죽과 사슴고기를 넣은 좁쌀죽의 덕으로 나는 사흘만에 병석에서 겨우 일어날수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리효석중대장이 나에게 반《민생단》투쟁의 사나운 회오리가 일고있는 유격구의 실태를 상세히 통보해주었다.

그는 어느 현에서는 어떤 간부를 죽이였고 어느 현에서는 어떤 지휘관을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하였는가를 일일이 례증하였다. 그의 진술내용이 사실이라면 간도에서 현과 구의 지도간부들과 중대급이상 유격부대지휘관들은 거의다 숙청된것으로 알아도 무방하였다. 조선사람치고서 글줄이나 쓰고 연설가락이나 하던 사람들은 다 잡아 없애버리였다. 북만으로 원정을 떠날 때 왕청에 떨궈두었던 우리 부대 장병들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만한 정수분자들은 다 잡아제끼였다. 미처 처형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서기요, 회장이요, 구위요 하는 자리에서 싹 쓸어버리였다.


《민생단》의 조작은 조선에 대한 일제식민지통치의 지능화의 산물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민생단》을 내온 속심은 모략과 권모술수의 방법으로 조선혁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자는데 있었다. 총칼정치를 해도 안되고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쓰고 《내선일체》며 《동조동근》을 부르짖어도 안되니 조선사람들끼리의 골육상쟁으로 혁명세력을 숙청소멸함으로써 치안유지에서 당하는 고충을 해결하려는것이였다.


9.18사변후 만주지방에서의 혁명정세의 급격한 발전에 커다란 우려를 느낀 사이또총독은 간도시찰반 성원으로 동만지방에 파견된 박석윤과 연변자치촉진회의 거두 전성호, 연길주재 만주국군 군사고문 박두영, 수급반공특무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적인 민족주의세력을 내세워 1932년 2월에 연길에서 《민생단》을 조작하게 하였다.


《민생단》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으로서의 생존권확보》라든가, 《자유락토건설》이라든가,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허울좋은 구호를 들고 마치 조선사람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것이 최고의 경륜인것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실제상에서는 조선민족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모해하여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며 조중인민사이에 쐐기를 박아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킬것을 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어낸 간첩모략단체였다.


《민생단》의 반동적본질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의 《생활의 산업화》를 조선민족이 나아갈 《유일한 활로》라고 설교한 이 단체의 《조직취지》나 《강령》과 같은 문건들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적들은 조선과 만주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기간을 《생존권의 확보와 확충》을 위한 가장 좋은 《절대적시기》로, 식민지통치질서의 기반밑에서 암흑의 세계로 변한 조선과 만주를 《자유》와 《자률》의 《대지》로 묘사하는 한편 간도일대에 조선인에 의한 《자유의 락토를 건설해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마치도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만주강점과 식민지통치를 환영하며 간도일대에 대한 령토적야심이라도 가지고있는듯한 인상을 조성함으로써 조중인민과 조중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선린관계와 혁명적뉴대를 깨뜨려버리려고 획책하였다.


《민생단》이 철저한 반공주구단체라는것은 그 발기인이라는 사람들과 창립후 단장, 부단장,리사의 자리를 차지한자들의 경력만 보아도 쉽사리 가늠할수 있다.

이 조직의 발기인들로서 그 성립을 위해 전력을 다해온 경성갑자구락부 리사 조병상이나 《매일신보》 부사장 박석윤, 연변자치촉진회의 전성호, 김동한 등은 다 애국애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 혁명가로 자처하였으나 례외없이 일제가 오래전부터 손때를 묻혀 길들여온 반역아들이였다.


16살에 일본류학을 가는것으로써 친일의 첫 걸음을 뗀 박석윤은 도꾜제국대학 법과와 제국대학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등 일류급의 대학들에서 여유있는 수학생활을 하였다. 영국에서 류학을 할 때에는 매해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3,000여원에 달하는 거액의 학비까지 받았다고 한다.

해외류학후의 그의 직함은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였다.

《동아일보》 기자, 《매일신보》 부사장, 일본외무성촉탁 만주국 외교부 참사관, 뽈스까주재 만주국 총령사… 등 귀국후 그가 력임한 직무들과 후날 쏘일중립조약체결시 일본측 단장으로 그 조약문에 수표했던 외상 마쯔오까 요스께가 이끄는 일본대표단 성원으로 1932년 제네바에서 열렸던 국제련맹총회에까지 참석한 현란한 경력은 그가 일본지배층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가 하는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석윤의 체면을 세울수 있게 그로 하여금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비난하는 사설도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반대하여 총독과의 정면대결도 하게 하고 태평양전쟁말기 려운형이 주관한 건국동맹에도 관여하게 하였지만 《민생단》과 관련된 원한도 있어 간도지방의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해방직후 박대우란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양덕에 숨어살다가 적발되여 민족반역자로서 준엄한 심판을 받은 박석윤은 재판정에서 일제통치하 조선사람의 《민족자치》가 자기의 정치적리념이였다는것, 조선도 영국의 식민지들인 카나다나 남아련방과 같은 정치발전의 코스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는것, 바로 이런 정치리념으로부터 사이또총독과도 가깝게 지냈고 일본의 이름있는 세계제패론자이며 동아련맹의 정신적고취자의 한사람인 이시하라 간지도 숭배하였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또한 《민생단》의 창립취지가 공산당과 유격대의 괴멸에 있었다는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민생단》의 초기목적은 순수한 《생존권확보》에 있었다는것과 이 조직이 일제의 지령을 받는 간첩주구단체로 전락된것은 자기가 간도를 떠나간후의 일이라는것, 반《민생단》투쟁과정의 혹심한 피해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랐다는것, 자기는 일본인들의 조종을 받는 하나의 인형에 불과하였다는것 등을 진술하였다.


박석윤의 고백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있는가 하는것은 력사만이 판정할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실여부는 어떠하든지간에 그가 일제의 충견이며 심복이였다는 사실은 그 어떤 론거로써도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민생단》창출의 산파역을 논 박석윤이 일본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라면 《민생단》모략공작의 현지하수인이였던 김동한은 로씨야의 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였다. 김동한의 인생은 공산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는 10월혁명직후에 벌써 로씨야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고려공산당군사부 위원과 장교단장직을 력임하면서 사관학교졸업생으로서의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초에 연해주에서 일제에게 체포되자 인차 급전향을 하여 반공일선에 선 친일특무가 되였다.


김동한은 《민생단》이 해체된후 관동군의 승인을 얻어 그 후신인 《간도협조회》를 조작하였으며 100여명의 반동들로 의용자위대라는것까지 무어가지고 다니면서 혁명군《토벌》에 극성을 부리였다. 그는 자기를 조선에서 태여난 일본인이라고 착각할만큼 일본인으로 철저히 동화된자였으며 조선민족은 일본을 조국으로 하여 성심성의를 다하여야 한다고 고창할 정도로 매국배족근성이 골수에까지 사무친 수급역적이였다. 《만선일보》가 전하는 자료에 의하더라도 그가 귀순시킨 공산주의자는 자그만치 3,8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김동한이 죽은후 일제는 연길서공원에 그의 동상과 《간도협조회》의 현창기념비라는것까지 세워주었다.

일제의 《간도치안전략》에 따르는 사상모략시책으로 《간도성내의 조직의 전모를 밝히고 약 4,000명을 체포하고 그들을 지지하고있던 사회적기반을 붕괴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 이른바 《민생단전략》의 실상을 잠간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민생단》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간도민생해결을 목적으로 조직된것이 아니였다는것은 처음부터 명백한것이였지만 일제침략자들은 그 당시 그 단체에 민족주의적허울을 씌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일본사람들은 《민생단》의 간판을 민생고의 해결이라는 구슬로 현란하게 장식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그 단체의 우두머리들이 일본령사관의 뒤문으로 뻔질나게 드나드는것을 인차 간파하였다. 적들은 만인의 예리한 시선앞에서 《민생단》의 정체를 오래 숨겨둘수가 없었다. 우리는 혁명적출판물들과 구두강연을 통하여 그 정체를 제때에 발가놓는 한편 반《민생단》투쟁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리도록 하였다. 간판에 현혹되여 멋도 모르고 《민생단》에 들었던 사람들이 이 조직을 인차 탈퇴하였으며 주구로 전락되여 암해공작에 나섰던자들은 군중의 손에 의해 적발처단되였다.


《민생단》은 창립후 얼마 못되는 사이에 해체의 쓴맛을 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우리 대내에 《민생단》조직을 거의나 박지 못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여 《민생단》이 없는 반《민생단》투쟁이 계속될수 있었으며 《민생단》 아닌 사람들이 《민생단》으로 몰려 무리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당이 있고 인민정권이 수립된 간도의 유격구들에서 3년동안이나 지속될수 있었는가 하는것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모략에 있었다.

사이또총독의 전면적인 지원과 룡정일본령사관의 적극적인 배후공작으로 빛을 보았던 《민생단》은 1932년 4월 조선주둔군의 간도파병과 함께 신임총독 우가끼의 의사에 따라 해체되였으나 그것은 형태상으로 자취를 감춘것에 불과하였다. 《민생단》은 해산되였지만 그것을 부활시키기 위한 운동은 김동한, 박두영 등을 축으로 하여 비밀리에 맹렬하게 전개되였다.


1934년 봄에 연길헌병대장 가또 하꾸지로(패전당시의 북중국특별경비대 사령관)와 독립수비보병 제7대대장 다까모리 요시는 박두영을 비롯한 친일분자들과 함께 간도의 치안문제를 다시금 협의하면서 《민생단》조직을 부활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으로 《민생단》모략공작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되였다.


그들은 《민생단》조작이 만주성위산하의 동만특위를 상대로 하는 사상모략시책임을 명백히 하고 활동의 기본골자를 첫째로 《조선인유격대에 대한 강력한 자체붕괴분단시책》, 둘째로 《조선인유격대에 대한 량도차단시책》, 셋째로 《조선인유격대에 대한 적극적인 투항귀순권고》, 넷째로 《투항귀순자에 대한 보호, 정주감시시책》,다섯째로 《투항귀순자에 대한 직업훈련, 생업알선》에 두었으며 연길헌병대가 모략활동전체를 통괄하도록 하였다.


1934년 9월에는 《민생단》활동이 강화되는데 따라 생기게 될 《귀순투항자들을 일괄처리하며 귀순자의 배후관계, 위장귀순유무 확인, 세뇌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기관으로 《간도협조회》를 만들어내였으며 여기에 《민생단》을 통합하였다.


김동한을 우두머리로 하는 《간도협조회》는 동만특위의 반《민생단》투쟁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여러가지 음모활동을 감행하였다.

일본의 음험한 모략가들이 공산당과 항일유격대를 상대로 한 사상모략공작의 기본바탕으로 삼은 정치적요점은 동만항일유격대의 조직구성과 지휘체계에서의 특수성이였다. 그들은 인민혁명군이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공동의 무장력이라는 점을 하나의 본질적인 약점으로 간주하였다. 일제의 모략가들은 제나름으로 중국인간부들은 조선인당원들을 신용하지 않고 부단히 감시하고있기때문에 조선인당원들과 대립되여있다고 보았으며 바로 이 특수성을 리용하여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하였다. 조선사람이 만주에서 피를 흘리는것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기를 쓰고 싸우는가, 왜 력량상 우세한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에게 매워 무의미한 싸움에서 피를 흘리는가, 빨리 각성하라, 투항귀순의 길은 열려있다, …이러한 사상을 열심히 주입시키는것을 《민생단》사상모략공작의 주요한 선전요령으로 삼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민생단》이 해체된후 특무들과 주구들을 발동시켜 유격구들에 《민생단》원들이 수없이 침투된것처럼 소문을 내돌리면서 견실한 간부들과 혁명가들을 모해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경원시하게 하였다.적들자신도 《간도공산당파괴경험》이라는 비밀문건에서 처음에 《민생단》을 10명씩 조직하여 유격대안에 들여보냈으나 다 붙잡혀 죽게 되여 더는 침투시킬수 없었기때문에 조선사람과 중국사람, 로동자와 농민, 상부와 하부간에 호상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리간시키는 전술을 써서 공산주의자들끼리 싸우게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혁명대렬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교란작전에서 일본의 모략가들이 발휘한 솜씨는 실로 놀랄만한것이였다. 그 술책가운데는 이런 수법도 있었다. 가령 동만특위에서 어떤 간부가 지방에 순시를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이 오가는 길에다 이전에 지도사업차로 그 지방을 왕래하던 현급간부나 구급간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떨어뜨리였다.

그러면 특위 순시원이 그 편지의 수신인들을 어떤 인간들로 보겠는가.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의 길을 걷게 된 다른 하나의 리유는 만주성위나 동만특위, 각급 현당과 구당조직의 책임적위치를 차지하고있던 형형색색의 일부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야망에 있었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대렬안에서 지도적지위를 독차지하고 상승일로의 길로 전진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을 자기들의 정치적야망을 실현하는데 종속시키려고 하였다면 파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지와 묵인속에서 종파적목적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대오로부터 사정없이 제거하고 자파세력을 확대하는데 이 투쟁을 악용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차지하고있는 방석을 가로타고 앉을 구실을 마련해준것이 바로 《민생단》이였다. 너는 《민생단》이니 자리를 내놓아야겠다거나 죽어야겠다고 선언하면 다였다. 이런 판결에는 상소가 있을수 없었으며 또 상소를 했대야 통하지도 않았다.


일제가 류포시킨 《민생단》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적자리를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고싶어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적이며 출세주의적인 욕구에 불을 붙여주는 인화물질과 같은것이였으며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실적은 유격구의 혁명력량을 모조리 교살해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리득을 가져다주었다.


결국은 적아가 합세하여 유격구를 마구 짓뭉개놓은셈이다. 이런 기괴한 결탁은 세계의 어느 혁명전쟁사에서도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반《민생단》투쟁이 이처럼 파쑈국가의 군법이나 중세기의 종교형벌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황당하고 가혹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진행되게 된것은 일제의 간악한 모략과 그에 속아넘어간 동만특위의 일부 사람들의 정치사상적암둔성과 그들이 추구한 목적의 비렬성에 기인한것이였다.


그 당시 그들이 《민생단》이라고 보는 표징에는 제한이 없었는데 그것을 형태별로 분류해놓으면 실로 수백가지나 되였다.


유격대의 식사를 보장해주는 작식대원이 밥을 설군것도 《민생단》으로 몰릴수 있는 리유가 되였다. 밥에 돌이 섞이거나 물에 밥을 말아먹어도 그것은 곧 《유격구의 인민들을 병들게 하려 한 증거》로 되고 《 〈민생단〉의 작용》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쓰는 조건으로 되였다.

설사를 하면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민생단》, 한숨을 쉬면 혁명의식을 마비시킨다고 《민생단》, 오발을 하면 적들에게 유격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라고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는 말을 하면 민족주의를 고취한다고 《민생단》, 일을 잘하면 정체를 숨기려는 수작이라고 《민생단》…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였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민생단》으로 걸려들지 않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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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화룡현의 반제동맹위원회 책임자는 재인강에 나가서 정치공작을 하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30여명의 애국자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자위단원들은 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사람한사람씩 목을 쳐서 죽이였다. 고도도 물론 그런 형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도의 목은 땅에 굴러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목의 살과 가죽이 훌렁 벗겨져서 등에 가붙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였다. 이것은 죽음 그자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치명상이였다. 고도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적들은 사형장을 떠나가버리였다. 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형장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등에 가붙은 살가죽을 목에 끌어다 붙이고 옷을 찢어 동여맨 다음 60여리의 험산준령을 배밀이로 기고 굴러서 마침내 어랑촌유격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고도의 상처가 완치되기도전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군중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그가 적의 주구로서 혁명대렬내에 깊숙이 잠복하려고 일부러 목에 상처를 내가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다는것이다. 좌경분자들은 고도의 《죄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심판장에 끌려나온 군중들은 그들의 판결을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판의 조직자들은 고도를 살려두고 일정한 기간 검열을 통해 그의 정체를 밝힌다는 판결을 내리였으나 뒤에 돌아가서 그를 암살해버리였다.

반《민생단》투쟁을 극좌의 수렁창으로 끌고가는데서는 이처럼 화룡현이 제일 과도하고 혹심하였다. 그것은 이 지방에서 당조직의 지도적직책을 차지하고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치적목적을 실현하는 방향에서 사람들의 운명을 제멋대로 롱락하였기때문이였다.
《숙반》의 화살은 혁명실천에서 모범적이고 군중의 신망이 높은 사람들, 아첨과 굴종을 모르고 불의와의 타협을 모르는 견실한 사람들에게로 집중되였다.

조선인간부들중에서 반《민생단》투쟁을 제일 극좌적으로 벌린 인물은 김성도였다. 동만특위가 왕청에 자리잡고있을 때 거기서 김성도는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처를 끼고 다니면서 특위, 현위의 간부들과 함께 술놀이와 화투놀이를 자주 하였다. 안해가 신녀성행세를 하며 살림살이를 게을리하였으므로 그의 집안 일은 다 아동단원들이 도맡아해주다싶이 하였다. 김성도는 아편꽃이 곱다고 하면서 인민들을 동원시켜 아편을 심게 하고 그 진을 받아 자기한테 바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줄곧 《청렴정치》를 념불처럼 뇌이였다.

이처럼 뒤생활이 게접지레한 김성도가 진실한 혁명가들을 《민생단》으로 걸어제낀것은 언어도단이였다. 심지어 그는 아동단원들에게까지 《민생단》에 들었다는 자백서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정치공작에서 많은 공로를 세운 룡정 동흥촌아지트책임자 김근수도 좌경분자들의 마수에 걸려들어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나는 〈민생단〉이 아니다. 정 의심스러우면 나의 두발목을 자르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 두다리를 자르면 도망치지 못할것이 아닌가. 당신들이 나를 죽이지 않고 두다리만 자른다면 손으로 노전을 결어서라도 혁명에 이바지하겠다. 혁명을 더하지 못하고 죽는것이 원통하다.》
이것은 사형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였다.

그러나 《숙반》지도부는 도리여 《저걸 보라. 저놈이 죽으면서도 〈민생단〉작용을 한다.》고 하면서 끝내 그를 몽둥이로 쳐죽이였다.
《숙반》의 철퇴는 당조직과 대중단체의 범위를 벗어나 유격대의 머리우에까지 떨어졌다.
《호미긁개》라는 토색적인 별명을 가지고 유격대에서 모범전투원으로 활동하던 양태옥도 《민생단》모자를 쓰고 군중심판을 받았다.
《죄명》은 고의로 총의 격발기를 못쓰게 만들었다는것이였다.

양태옥에게 《호미긁개》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그가 자기네 조직책임자와 함께 삼포동음식점에 내려가 집사대원들한테서 무기를 탈취한 다음부터였다. 그때 두놈의 집사대원은 음식점안에 들어가 아편을 피웠고 한놈은 문전에서 보초를 서고있었다. 양태옥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 보초와 격투를 하였다. 그런데 힘으로써는 그놈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양태옥은 허리에 차고 간 호미로 집사대원의 면상을 긁어놓았다. 집사대원이 얼굴을 싸쥐고 너부러진사이에 총을 걷어메고 삼포동산등으로 숨이 가쁘게 치달아 올랐다. 그는 비탈을 톺아오르면서도 총을 쏘아보고싶은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날수 없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기대하는 《꽝》소리는 나지 않았다. 안전장치가 되여있었던것이다. 양태옥은 호미로 격발기를 쳐서 안전장치를 떨구었다. 하지만 호미등에 얻어맞은 격발기의 상처로 하여 그는 후날 유격대에서 제거되여 적구로 추방당할 운명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좌경분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벙거지를 씌우고 극형에 처했거나 유격구밖으로 추방한 사람들은 대체로 《호미긁개》와 같이 목숨을 아낄줄 모르는 용감하고 쟁쟁한 투사들이였다. 이런 투사들이 《민생단》노릇을 하려고 가짜권총이나 호미를 가지고 백주에 무장경관들의 수중에서 총을 탈취해내는 그런 모험을 했겠는가. 그래 심판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인간들에게는 그런 열혈투사들이 《민생단》이라는데 들어갈 리유도 없고 반혁명에 가담할 필요조차 없다는것을 판별할만한 지능도 없었단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판단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혁명에 참가한 사람치고 그런 정도의 판단력조차 못가진 천치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안도투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창즈에서만도 수백명의 조선사람들이 《민생단》바람으로 학살되였다고 한다.

동만당과의 련계가 깊었고 간도의 실정에 무척 밝은 주보중도 자기의 회상록에서 《민생단》에 걸려 죽은 사람의 수가 2,000명이나 된다고 증언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을 진두에서 지휘한 사람들은 《숙반》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로서는 감히 자행할수 없는 악착스러운 방법으로 당조직과 대중단체 성원은 물론, 아동단열성자에 이르는 모든 《민생단》혐의자들에게 참을수 없는 고통을 가하였다.

《숙반》운동의 앞장에 섰던 김성도, 송일,김권일 자신들도 나중에는 《민생단》이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당하였다. 송일과 김권일은 다 좋은 사람들이였으나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상급에 맹종맹동하다나니 본의 아닌 과오를 범하였다. 나는 그들이 사형장에서 우리의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 두사람은 나와 중요한 로선상 문제를 가지고 론쟁도 자주 하였다. 그들이 사형장에서나마 리성으로 돌아와 랭철하게 자기자신들을 돌이켜본것만은 틀림없는것 같다.

박현숙이라면 왕청치고도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일류급의 신녀성이였다. 눈이 별같이 반짝반짝한다고 하여 소왕청사람들은 그를 《새별눈》이라고 불렀다. 예능에 조예가 깊은 그는 왕청에서 한동안 아동국장으로 사업하였다. 나이는 그닥 많지 않았지만 지하공작경험이 비교적 풍부한 녀자였다. 그의 시아버지 최창원(최노톨)은 현반제동맹책임자였다.

박현숙이 아직 최형준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 그의 지도를 받고있던 무단천의 아동단원들은 두사람사이를 오가면서 통신련락을 부지런히 하였다. 박현숙이 돈을 주면 아동단원들은 상점으로 돌아다니며 유격대에 보낼 물품들을 구입하였다. 이 물품들은 《새별눈》의 손을 거쳐 비밀유격대와 별동대의 조직을 서두르고있는 투사들에게로 전달되였다.

박현숙의 일거일동을 은밀히 주시하고있던 적들은 그에게 체포령을 내리였다. 그날 《새별눈》은 결혼식을 축하해주려고 어떤 동료의 집에 가있었는데 경찰들이 그 집에까지 따라와서 박현숙을 내놓으라고 행패질을 하였다. 자기때문에 집주인이 봉변을 당하게 되자 천정에 숨어있던 박현숙은 더 참아내지 못하고 《나 여기 있다.》고 하면서 경관들앞에 뻐젓이 나타났다. 그는 감옥에 끌려가 살점이 뭉청뭉청 떨어져나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면회를 오면 떡함지에 혁명가요를 써서 내보내주는 식으로 오히려 감옥밖의 인민들과 동지들을 고무해주었다. 그후 경찰은 그를 석방하였다.

박현숙이 최형준과 결혼잔치를 하는 날에는 공산당녀자가 시집을 어떻게 가는지 보자고 하면서 백초구경찰들이 무슨 낌새라도 맡으려고 3명이나 끼여들어 술을 얻어마시고 신부에게 노래까지 청하였다. 《새별눈》은 그 요청을 받고 혁명가요를 냅다 불렀다. 취중에 신부의 노래를 들은 경찰들은 그것이 혁명을 선동하는 노래인줄도 모르고 공산당녀자가 대단한 명창이라고 하면서 재청까지 요구하였다.

박현숙의 남편 최형준도 혁명에 충실한 사람이였다. 남부럽지 않게 가정생활도 하고 투쟁도 잘하였는데 그만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서 절름발이가 되였다. 그다음부터는 지방공작에서 종전과 같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타고 다닐 말이 있는가. 자동차가 있는가.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절름거리면서 먼길을 왔다갔다하다나니 남보다 일을 축내지 못할것은 뻔하였다. 그런데 《숙반》지도부는 그에게 《소극분자》라는 간판을 붙이고 《민생단》으로 걸어 학대하고 감시하였다. 박현숙도 《민생단》의 안해라는 리유로 지도간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런 때에 그가 리혼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새별눈》을 타일렀다. 《민생단》문제는 일시적인것이고 어느때든지 해결될 문제이다, 최형준은 처음부터 지하공작을 잘하던 사람이고 유격구에 들어와서도 투쟁을 잘하던 동무가 아닌가, 그는 리론수준도 있는 혁명가이다, 그런데 왜 리혼하려고 하는가, 옳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후 우리는 박현숙을 쏘련으로 들여보내였다. 《새별눈》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반《민생단》열파로 초목마저 떨던 왕청시절을 어떤 심정으로 회상하겠는지 모르겠다.

유격구의 인민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다 동요하였다. 혁명이라는것이 그저 그렇더라, 걸핏하면 저희들끼리 서로 죽일내기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그저 그 모양이더라, 조선사람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간도땅에서 농토도 개척하고 혁명도 개척했는데 그 선구자들을 다 잡아죽이고 줴내깔리니 이게 도대체 무슨놈의 심보인가, 이거야 령도권을 잡기 위한 숙청이 아니고 무엇인가, 권력을 위해서 지난날의 의리나 인연마저 다 저버리고 자기편을 서슴없이 학살하는것이 혁명이라면 이따위 혁명은 해서 뭘해, 이런 도깨비놀음을 할바엔 차라리 처자권속을 거느리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든가 하다못해 산중에 들어가 중이 되여 목탁이라도 두드리며 돌아다니는게 낫지 않겠는가고 사람들은 쓴입을 다시며 생각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미친바람은 이처럼 사람들의 인생관과 혁명관에 녹이 쓸게 하였다.

무의식군중들은 자연히 혁명을 버리고 적구나 무인지경으로 도주하게 되였다. 혁명을 하려고 왔다가 혁명한테서 구박을 당하고 허공중에 뜬 신세가 되였으니 그들이 깃을 붙이고 살아갈곳은 과연 어데란 말인가. 혁명이란 살기 위해서 하는것이지 죽기 위해서 하는것은 아니다. 살아도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해서 하는것이 혁명이며 죽어도 정의를 위해 한몸을 아낌없이 바치다가 싸움터에서 값있게 죽어 영생을 얻는것이 혁명이다.

그런데 영생이 다 무엇인가. 혁명가들은 어제날까지 한가마밥을 먹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도살당하였다.
그러기에 해방후 나는 반《민생단》투쟁때문에 적구로 내려가서 《귀순》한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선포하였다. 혁명을 하고싶어도 할수 없게 만드는 인간들한테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유격구를 결별한것이 어떻게 죄로 될수 있겠는가.

무지한 살륙으로 하여 왕청의 강들과 고동하의 물이 선혈로 걸어지고 간도의 어느 골짜기에서나 통곡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
이런 현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사충항도 간도땅을 결별하였다. 나는 가겠다, 여기서 이이상 더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살지 못하겠다, 공산당이 정치를 하는곳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수 있단 말인가, 동만당지도부가 공산당을 망신시킨다고 하면서 북만으로 가버리고말았다.

나는 반《민생단》투쟁의 엄중성을 간파하고 진상을 더 구체적으로 료해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 당시 요영구인민들은 적들의 《토벌》이 심하였기때문에 수림속에 들어가 토굴집을 짓고 살았고 혁명군은 유격구어귀에 병실을 짓고 생활하면서 인민들을 보호하였다. 유격대병실에서 마을까지는 15리쯤 가야 하였다.

내가 전령병들을 데리고 마을에 올라가 로인들과 담화를 하고있을 때 홍혜성이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로인들과의 담화를 끝내자 그를 만나보았다.
《지휘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합니다. 이거야 어디 억울해서 견디겠습니까. 왕청땅에 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아왔는데 이 마음고생만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겠습니다. 간도땅에서 이런 성화를 받으면서 혁명을 할바에는 차라리 국내에 나가서 지하투쟁이나 합시다. 여기서처럼 유격근거지 같은것은 창설하지 못해도 지하투쟁 같은것이야 얼마든지 할수 있지 않습니까. 필요한 공작비는 약방을 운영하는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보장해드리겠으니 조선으로 나갑시다.》
홍혜성은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사래질로 그에게 음성을 낮추라고 신호하였다.
《혜성동무,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소리를 탕탕 하오.》
《장군님을 믿고 하는 말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그런 말은 삼가하는것이 좋겠소.》

나는 홍혜성의 고백을 듣고 서글픈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홍혜성이마저 유격구를 떠나려고 결심하였다면 이 왕청땅에 남아서 혁명을 계속할 인물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암담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유격구를 열렬히 사랑해온 처녀였다. 유격구도 그에게 큰 애정을 부어주었다. 그는 대담한 지하공작원인 동시에 생기발랄하고 열정적인 아동들의 스승이였으며 면허증은 없으나 진단을 잘 내리고 치료를 잘하는 비전임의사이기도 하였다.

동만당지도부와 왕청현당의 간부들가운데는 그의 치료를 받고 3년묵은 옴병을 뗀 사람들도 있었다. 옴을 뗀 사람들은 누구나 홍혜성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간부들도 그를 재간둥이라고 칭찬하였다.
홍혜성은 자기야말로 유격구에 필요한 존재이며 더우기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그가 돌변하여 나에게 탈출을 호소한것이다. 처녀는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민생단》으로 처형될수 있었다. 그가 나를 믿고 자기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한것은 고마운 일이였다. 유격구의 공기가 얼마나 살벌했으면 그처럼 열정에 넘치고 투쟁욕으로 충만되였던 홍혜성이 탈출까지 결심하였겠는가. 동지들의 주검으로 뒤덮인 이 간도땅은 그에게 있어서 이전날 그렇게도 순정을 바쳐 사랑하던 별천지도, 보금자리도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었다.
《혜성동무, 그래서는 안되오. 나 하나가 죽고사는것은 문제가 아니요. 혁명이 망하는가, 흥하는가 하는 이 대목에 와서 고난을 참지 못하고 쉬운 길을 택한다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할수 있겠소. 고통스럽고 진절머리가 나더라도 여기서 〈민생단〉문제를 수습하고 투쟁을 계속해야 하오. 이것만이 혁명가가 갈 길이고 혁명을 구원하는 길이요.》

내가 이런 의사를 표시하자 홍혜성은 눈물을 씻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도 막막해서 그런 말을 했으니 용서하십시오. 난 그 말을 하고싶어 북만에 가신 장군님을 그냥 기다렸습니다. 나뿐이 아니랍니다.
사람들은 〈민생단〉감옥에서도 대장동지를 찾았습니다. 김대장이 언제 돌아오는가, 김대장한테서 소식이 없는가, 김대장한테 동만의 소식을 전달할 방법은 없는가고 하면서 대장동지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북만원정대가 다 죽었다는 소문만 자꾸 나지 않겠습니까. 일본놈들도 그렇게 신문에 내구요.》
홍혜성은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가슴에 두손을 포개여 얹었다.
나는 그의 눈굽에 맺히는 피방울 같은 눈물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은 자책을 느끼였다.

홍혜성의 말은 나로 하여금 조선의 혁명가로서 자기에게 지워진 책임을 두고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혁명이 이 모양, 이 꼴대로 타살되고마는가, 아니면 부활하여 다시 일어서는가 하는 엄숙한 시점에서 만일 수천수만의 생령들을 위협하는 《숙반》의 무분별한 살인망동을 저지시키지 못한다면 나자신도 조선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으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반《민생단》투쟁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회의를 소집할것을 동만당지도부에 제기하였다. 만주성위의 순시원도 때를 같이하여 이러한 회의소집을 발기하였다.
며칠후 나는 한장의 통신문건을 받았다. 그것은 다홍왜에서 동만지방 군정간부들의 련석회의를 소집한다는 통지서였다.

출발을 앞두고 나는 작식대병실을 찾았다. 몇달째 《민생단》혐의를 받고 울적해한다는 홍인숙어머니를 만나 북만에서 마련해가지고 온 옷감을 선물하려는것이였다. 《민생단》혐의자에게 선물을 주면 대장도 《숙반》지휘부 사람들에게 걸려들수 있다고 전우들이 경고하였으나 나는 그 경고를 무시하였다. 인도주의가 죄로 될수 있다니 그게 될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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