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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4-9.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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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604회 작성일 15-04-02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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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리상촌》을 혁명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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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자들은 《리상촌》건설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리상촌》이라고 하면 누구나 착취와 압박이 없고 불평등이 없으며 만사람이 다같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계(마을)를 련상할것이다. 오랜 옛적부터 우리 민족은 이런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를 꿈꾸어왔다.


민족주의자들이 제창한 《리상촌》건설에 대한 주장은 만민이 유족하고 화목하고 평화롭고 오붓하게 살아가려는 조상들의 지향과 념원을 반영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리상촌》건설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물은 안창호였다.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직후 중국 청도에서는 안창호, 리동휘, 신채호, 류동열 등이 모여 회담을 벌리였는데 여기에서 안창호가 내놓은것이 바로 《리상촌》건설에 대한 방안이였다. 심중한 론의끝에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미국사람들이 경영하던 대동실업회사(밀산현)의 땅을 사들여 그것을 개간하고 사관학교도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이런 《리상촌》을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자금도 뽑고 인재도 키우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물적, 인적, 재정적 기초를 마련하자는것이였다.


이 계획이 류산된후에도 안창호는 여러해동안 《리상촌》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적당한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고난에 찬 노력을 하여왔다. 그가 《리상촌》건설에 이처럼 큰 심혈을 기울인것은 《실력양성론》을 물질적으로 뒤받침할수 있는 독립운동의 기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데 있었다.


《리상촌》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당시 독립운동에서 하나의 풍조로 되여있었던것 같다.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장을 만들고 무관학교의 설립으로 실력양성의 소박한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료하농촌도 그런 풍조를 타고 생겨났다.


료하농촌을 처음으로 개척한것은 남만지방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이였다. 송석담, 변대우(변창근), 김해산, 곽상하, 문상목을 비롯한 남만의 민족주의세력중 일부가 서부방향으로 방황하다가 료하기슭에서 보짐을 풀었다. 그들은 조선의 리상촌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여기에 300여호의 동포들을 이주시킨 다음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별세상을 꾸리기 시작했다. 우에서 렬거한 다섯세대가 먼저 살았다고 하여 그들이 정착한 고장에 오가자라는 지명을 달았다.


그 당시 길림의 문광중학교에 다니는 동무들가운데 고유수와 오가자지방에서 온 청년들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이 오가자가 좋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는 오가자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으며 이 마을을 혁명촌으로 개조할 결심까지 품게 되였다.


내가 동만에서 오가자로 간것은 1930년 10월이였다. 나는 원래 동만에서 무장투쟁준비와 관련된 큰 회의를 소집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정세로 보아 그곳이 회의장소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여 장소를 오가자로 변경시키였다. 몇달동안 오가자에 눌러앉아 회의준비를 하면서 겸하여 마을의 혁명화도 다그치자고 결심하였다. 가보니 듣던대로 풍속도 좋고 인심도 좋았다.


이고장에서는 바람이 심하여 지붕에 기와를 올리지 못하고 진흙을 발랐다. 염분이 섞인 진흙을 바르면 비가 새지 않았다. 오가자사람들은 담장도 흙으로 규모있게 쌓았다. 진흙을 파서 메로 두드리다가 돌처럼 굳어졌을 때 일정한 규격으로 잘라가지고 담장을 쌓았는데 그렇게 만들어낸 토피는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 그고장 농민들이 장담하였다.


오자가를 개척한 유지들은 자기들의 리념이나 주의주장과 맞지 않는 이색적인 사상조류가 마을에 들어오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과 합심하여 진펄을 논으로 개간하고 마을에 학교도 세웠다. 농우회니, 청년회니, 소년학우회니 하는 대중조직도 내오고 촌공회라고 부르는 자치기관도 내왔다. 일본이 《한일합병》을 선포한 8월 29일이 오면 마을의 주민들을 모여놓고 《국치일가》를 부르게 하였다. 일본군경들과 중국반동군벌의 마수가 잘 미치지 못하는 자기네고장을 오가자사람들이 《천국》으로 여기게 된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가자의 주민구성에서 대다수를 이루는것은 평안도사람들과 경상도사람들이였다. 경상도사람들은 남만청총계통의 엠엘파의 영향밑에 있었고 평안도사람들은 주로 정의부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나는 평안도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오가자에 가서도 카륜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사람들의 집에 자주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상도사람들이 신경을 쓸수 있었다.


우리는 카륜에 있을 때 조선혁명군대원들을 공작원으로 몇몇 파견하였지만 그들이 오가자에 와서 크게 맥을 추지 못하였다. 고집이 세고 지반도 확고한 마을의 유지들을 설복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동무들의 소개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 한두주일도 아니고 몇달동안이나 한 고장에 그처럼 오래 붙박혀있은것은 우리가 오가자를 그만큼 중시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는 오가자를 중부만주일대에서의 민족주의세력의 마지막보루로 보았다. 여기에서 사업을 잘하면 오가자를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만들수 있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북부국경일대에서 농촌마을들을 우리의 영향하에 둘수 있었다.


우리가 혁명의 기본동력을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로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의 혁명화에 많은 힘을 기울인것은 우리 나라 계급구성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된다. 농민은 우리 나라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었다. 간도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구의 80%이상이 조선사람이라면 그중 90% 정도는 농민이였다. 군벌들의 박해와 지주, 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한 가혹한 수탈로 하여 그들은 최악의 빈궁과 무권리속에서 살고있었으며 지대를 통한 착취와 함께 노비라든가 노예들에게 가해지는것과 같은 경제외적착취에 의해 사정없이 혹사당하였다.


국내에 사는 농민들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였다. 이것은 농민대중이야말로 로동계급과 더불어 혁명에 가장 절실한 리해관계를 가지는 계급이며 우리 혁명에서는 농민이 로동자와 같이 주력군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농촌의 혁명화는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서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고리였다.


공작원들의 활동으로 청년들속에서 우리의 지향을 따르려는 열망이 급속이 높아지게 되자 오가자의 유지들은 대통을 휘두르며 요새 젊은것들의 머리에 딴물이 들어간다고 하면서 료하벌에 사회주의를 끌어들이는 놈팽이들은 뼈가 성하지 못할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간도는 공산당때문에 다 망했다는데 그 미친 바람이 오가자에까지 들어오면 료하농촌도 무사치 못할것이라고 말하는 유지들도 있었다.

서뿔리 서두르다가는 유지들의 대통에 얻어맞을수 있었다.


청년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공산주의행진곡에 발을 맞추어야겠는데 령감들의 눈에 날것 같아서 망설이였다. 주대가 좀 있다는 청년들은 유지들과 엇서나갔다.

나는 공작원들의 보고를 듣고 오가자를 혁명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보다도 유지들과의 사업을 잘하는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유지들의 사고방식을 돌려세우지 않고서는 오가자를 《리상촌》건설의 허황한 꿈에서 건져낼수 없었으며 료하농촌을 중부만주의 본보기농촌으로 만들어보려는 우리의 구상도 실현할수 없었다. 유지들만 돌려세우면 나머지사람들은 우리가 할탓이였다.


그런데 우리 공작원들은 석달째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변두리만 돌고있었다. 오가자의 유지들이 그만큼 간단치 않았다. 독립운동의 전적에다가 학식과 리론을 겸비한 령감들이여서 보통수완을 가지고서는 그들에게 말도 붙일수 없었다. 이 유지들의 집단이 마을을 쥐락펴락하였다.

촌공회를 뒤에서 조종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총찰하는 사람은 변대우라는 로인이였다. 그가 마을의 실권자로서 유지들을 조종하였다. 마을에서는 그를 《변뜨로쯔끼》령감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그런 별명을 붙인것은 그가 뜨로쯔끼에 대한 말을 자주 하였기때문이다.


변로인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국내와 만주각지를 떠돌아다니였다. 초기에는 고향 한천(평안남도)과 자성, 도청거우(림강현)등지에서 학교들을 세우고 교육활동을 하였다. 그가 무장활동에 관여한것은 1918년 림강의 모아산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독립군부대에 들어가있을 때부터였다. 그때 그는 나의 아버지와 련계를 가지느라고 림강의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변로인이 오지 못할 때에는 강진석외삼촌이 그와 아버지사이의 련계를 지어주었다.


대한독립단 선전부장과 민족독립군 부총재, 광복군 군법부장 겸 제1영장직을 거쳐 통의부의 실업부장직까지 차지하고 독립군운동을 추켜세우려고 동분서주하던 그는 1926년부터 군직에서 물러나 《리상촌》건설에 몰두하였다.

이 로인이 한때는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면서 쏘련의 원동지방에도 드나들었다. 그에게는 고려공산당에 관여했을 때 받았다는 푸른 뚜껑의 당증도 있었다.


변대우로인을 돌려세우지 않고서는 완고한 유지집단을 돌려세울수 없었으며 마을을 혁명화할수 없었다.

내가 오가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농우회사업을 책임지고있던 변로인의 아들 변달환이 나한테로 왔다. 그는 나에게 민족주의자들을 제끼고 오가자를 《리상촌》으로부터 혁명촌으로 만들어야겠는데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하면서 김선생이 왔으니 이제는 완고하고 쓸모없는 령감들을 타도하자고 하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변달환에게 물었다.

《타도라니? 그건 어떻게 하자는겁니까?》

변달환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였다.

《령감들이 뭐라건말건 우린 우리끼리 조직들을 내오고 딴가마밥을 먹으면서 오가자를 사회주의동네로 만들자는거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오가자가 둘로 쪼개질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로선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오가자를 저 락후한 령감들에게 맡길수는 없구.》

《문제는 유지들이 우리를 지지하게 만드는겁니다. 내가 회장선생네 아버지와의 사업을 좀 해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달환은 그 누가 접근해도 소용없다고 하였다. 그동안 국민부에서도 오고 상해림시정부에서도 오고 엠엘계의 공산당재건위원회의 인물들도 와서 저마다 오가자에 발을 붙이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 아버지한테서 랭대를 받고 돌아갔다, 어지간한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고 설사 상대가 록록치 않은 민족주의거두라고 해도 훈계를 해서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회장선생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친분관계가 있고 또 회장선생과 나도 구면이니 생판 모르는 남남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고 했더니 변달환은 벽창호같은 자기 아버지한테는 연고관계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몹시 난처해하였다. 변달환은 10년전에 우리 아버지에게 보내는 변로인의 편지를 가지고 림강에 온적이 있었다.


나는 마을의 유지들이 늘 모여앉군하는 변달환이네 집에서 여러날 《변뜨로쯔끼》령감과 담화를 하였다.

첫날에는 주로 변대우로인이 말을 많이 하였다.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려대는데 기상이 아주 도도하였다. 김선생의 아들이 와서 반갑다고는 하면서도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였다. 말끝마다 《너희들》,《너희들》하면서 훈시만 하였다. 인물이 잘나고 기상이 칼칼한데다가 리론수준도 상당해서 처음부터 위압을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변로인이 내 나이를 묻자 다섯살을 불쿠어 스물세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나이를 불쿠지 않고 열여덟살이라고 하면 그가 더욱 애숭이처럼 대할수 있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것만큼 스물세살이라고 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어디에 가나 나이를 물으면 스물세살 아니면 스물네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는것이 유지들과의 사업에서도 유리하고 청년들과의 사업에서도 유리하였다.


나는 변로인이 리치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는 경우에도 반박하거나 중단시키지 않고 례절을 차리면서 참을성있게 들어주었다.

로인은 요새 젊은이들은 남이 열마디를 하면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봉건이요, 뭐요 하면서 트집만 잡는데 성주와는 말할 재미가 있다고 하였다.

하루는 그 로인이 저녁을 차려놓고 나를 청하였다. 김형직선생이 생존해계실 때 자기는 림강에서 식사대접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은 자기가 변변치 않은 음식이지만 한상 차렸다고 하였다.


로인은 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이런 질문을 하였다.

《너희들이 우리〈리상촌〉을 허물어버리려고 왔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자기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을 제일 경계한다고 하던 변달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리상촌〉을 허물다니요. 우리가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로인님들이 공을 들여 꾸려놓은 〈리상촌〉을 왜 허물어버리겠습니까. 우리에겐 그런 힘도 없습니다.》

《음, 그런가. 그런데 우리 달환이를 필두로 해서 오가자의 젊은 녀석들은 밤낮〈리상촌〉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늙은것들을 타도하고 우리 동네에 붉은기를 날릴 생각만 하고있지. 소문을 들어보면 오가자의 청년들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성주라는데 길림청년들도 그 녀석들처럼 〈리상촌〉이라는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어디 한번 우리〈리상촌〉에 대한 견해를 솔직히 터놓아보아라.》


《나는 〈리상촌〉을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국에 쫓겨와서 방황하던 조선동포들을 한곳에 모여놓고 오붓이 살아보자고 꾸린것이 〈리상촌〉이겠는데 왜 나쁘다고 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료하진펄에 이런 정도의 조선동네를 만들어놓은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로인님들이 마을을 꾸리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변로인은 그 말을 듣자 흡족해서 코수염을 쓰다듬었다. 말투도 《너희》로부터 《자네》로 변하였다.

《그러면 그렇겠지. 자네도 이제 알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경찰도 없고 감옥도 없고 관청도 없네. 촌공회라는 자치기관을 통해서 조선사람들끼리 만사를 민주주의적으로 풀어나가고있단 말일세. 이런 리상적인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나는 이때야말로 《리상촌》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립장을 명백히 밝혀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로인님, 자치기관을 꾸려놓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생활상 편의를 도모하는 마을을 건설한것은 애국적인 소행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마을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독립할수 있겠습니까?》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리며 위엄을 뽑던 로인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눈섭만 씰룩거리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독립은 못해. 자네가 내 아픈곳을 면바루 건드렸네. 〈리상촌〉이라고 만들어는 놓았지만 독립운동에 보탬은 못주고있지. 그래서 나도 고민하고있네. 〈리상촌〉을 건설해서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리상촌》건설의 허황성을 론증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이국땅에다가 《리상촌》을 건설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로인님들의 노력으로 오가자가 다른 고장에 있는 조선인부락보다 더 살기가 편한 동네로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사람들의 리상이 해결되였다고 볼수는 없다, 우리 민족의 리상은 왜놈도 없고 지주도 없고 자본가도 없는 독립된 조국에서 착취와 압박을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것이다, 그런데 지주한데 빚을 지고 살면서 리상적으로 산다고 말할수 있는가, 왜놈들이 만주로 쳐들어오면 오가자도 무사치 못할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먹는것은 시간문제이다, 왜놈들은 조선민족이 리상적으로 사는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리상촌〉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는건가?》

변로인은 초조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였다.

《우리는 이 마을을 현상유지나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위해서 싸우는 마을로, 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자는것입니다.》

《그러니 오가자에 사회주의를 퍼뜨리겠단 말이지. 그건 안되네. 난 사회주의라면 질색이야. 기미년 여름에 관전에서 자네 아버지가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을 때 우리는 다같이 그 뜻을 지지했네. 그런데 그후 고려공산당을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공산주의자들이라는게 말짱 미친놈들뿐이더란 말일세. 그놈들이 하는짓을 보면 전부 종파질뿐이야. 그 다음부터는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오한이 나더군.》


변대우로인이 고려공산당에서 받은 푸른 당증을 꺼내보인것이 이때였다.

《성주가 혁명을 하느라고 아무리 애를 쓰며 돌아다녀두 이런 당증이야 없겠지?》

로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나는 그 당증을 펼쳐보다가 양복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었다.

뜻밖에 그런 일을 당한 로인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종파질을 하다가 망한 고려공산당 당증인데 좀 두고보겠습니다.》

로인이 당증을 돌려달라고 할것 같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자네들이 오가자를 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겠다고 하는데 특별한 방략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강동, 신안툰, 내도산, 카륜, 고유수 등의 마을들을 어떻게 혁명화하였는가 하는데 대해서 장시간 이야기하였다.

로인은 이야기를 매우 주의깊게 들었다.

그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네들이 말하는것을 다 들어보면 쓰딸린주의자들인데 나는 반대안하네. 그러나 쓰딸린만 쓰딸린이라고 해서는 안돼. 뜨로쯔끼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라고 하면서 뜨로쯔끼의 리론을 풀었다.

그렇다고 그가 맑스ㅡ레닌주의를 반대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뜨로쯔끼에 대하여 아주 강한 인상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내가 공산주의리론에 정통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상대하였지만 뜨로쯔끼를 그처럼 두둔하는 사람은 처음보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이상하여 변로인에게 물었다.

《로인님께서 뜨로쯔끼를 그처럼 숭배하는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사실 나는 뜨로쯔끼를 숭배하지 않네. 지금 청년들이 덮어놓고 큰 나라 사람들을 숭배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거네. 뜨로쯔끼면 뜨로쯔끼고 쓰딸린이면 쓰딸린이지 지금 젊은것들은 쩍하면 큰 나라 사람들의 명제를 끄집어내놓고 무엇이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그리 대단한것인가. 쓰딸린의 명제가 어떻고 뜨로쯔끼의 말이 어떻다는것이야 로씨야사람들이나 할 말이지 조선사람이야 조선의 얼을 가지고 제 나라 혁명을 잘하기 위한 말을 해야 할게 아닌가.》


로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며칠동안 《변뜨로쯔끼》령감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나는 그가 보통로인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처음에 혹시 이 로인이 뜨로쯔끼파가 아니겠는가 하는 의혹도 가지였다. 그러다가 뜨로쯔끼파는 아닌데 종파싸움에 신물이 나서 청년들에게 한번 경종을 울리는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너희들은 맹목적으로 이것도 숭배하고 저것도 숭배하는 식으로 살아가서는 안된다, 무엇때문에 로씨야가 어떻소, 쓰딸린이 어떻소 하면서 남의 나라의 말만 하는가, 매사에 로씨야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 로인이 우리한테 말하자고 하는 사상은 분명 이런것이였다. 요컨대 제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것이였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상관하지 않네. 내 아들의 일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네. 우리 달환이가 무엇을 하건 그것은 자기에게 달렸지.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자기 얼도 없이 남들의 명제를 맹목적으로 외워가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것과는 기어코 해보겠네.》


나는 로인의 이 말을 듣고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시종일관 반대해온 우리의 립장이 옳았고 자기의 힘을 믿고 자기 인민의 힘으로 혁명투쟁을 해나가야 한다는 우리의 견해가 옳았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다음날은 변대우로인보다 내가 더 많은 말을 하였다. 나는 카륜회의에서 우리가 채택한 로선을 두고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새형의 당과 군대를 내오고 사상과 신앙, 재산정도, 남녀로소의 차이를 뛰여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2천만의 항전으로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나의 말에 로인은 강한 충격을 받는것 같았다. 로인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무으려는 우리의 의향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특별이 환영하였다.


변달환이네 부자는 둘다 안해가 없었다. 로인의 딸이 살림을 하느라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가정에 배여있는 쓸쓸하고 궁색스러운 공기를 가셔버릴수 없었다.

나는 알맞는 배우자를 수소문하느라고 동무들과 의논을 거듭하던 끝에 오가자근방 농촌에서 심씨성을 가진 녀자를 물색하여 변달환과 짝을 무어주고 우리 사람들을 동원시켜 혼례까지 치르어주었다. 총각의 몸으로 나많은 사람들의 중매를 서자니 주제넘는 일 같기도 하고 좀 쑥스럽게도 생각되였지만 정작 그들의 혼사를 치르고나니 동네에서도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큰 일을 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일로 해서 우리는 마을유지들의 신임을 더 받게 되였다.


어느날 변달환은 나를 찾아와 자기 아버지의 동향을 전해주었다. 아버지가 마을유지들앞에서 《이제는 우리를 대신하여 〈리상촌〉을 맡아줄 임자가 나타났다. 성주네가 그 임자이다. 그들이 하는 식이 사회주의라면 우리도 마음놓고 받아들일수 있다. 성주를 나어린 청년으로만 봐서는 안되겠다. 우리들은 늙었고 시대에도 뒤떨어진 고물딱지들이니 젊은것들에게 오가자를 통채로 떠맡기고 성주네가 하는 일을 힘껏 돕기나 하자.》고 하더라는것이였다. 다른 유지들도 우리의 주장이 다 옳다고 하면서 탄복하더라고 하였다.

이런 동향을 듣고나서 나는 변로인을 다시 찾아갔다.


《고려공산당 당증을 돌려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니 로인은 그 당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한테는 그따위 물건짝이 필요없다고 하였다.

필요없다니 돌려줄수도 없고 버릴수도 없고 야단이였다. 그후 그 당증은 우리 동무들 손에서 며칠동안 돌아갔다.


조국이 해방된 다음해인 1946년에 평양으로 찾아온 변대우로인에게 그때 일을 이야기했더니 로인은 깊은 감회에 잠긴채 쓸쓸하게 웃었다. 그는 북조선전체가 하나의 리상촌, 리상천국으로 된것을 보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면서 오가자에서 우리가 만나던 때를 회고하였다. 그때가 로인이 67살이 되는 해였다. 나를 만난 그해에 로인이 길림성 이통현에서 별세하였는데 그 슬픈 소식을 나는 퍽 후에야 들었다.


변로인의 아들 변달환은 오가자에서 농민동맹책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우리의 지도밑에 반일투쟁을 하였다는 《죄》로 1931년부터 여러해동안 신의주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오가자의 혁명화를 위한 돌파구는 이렇게 열리였다.

유지들이 그 다음부터는 마을에 와있는 조선혁명군 공작원들을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 색다른 음식을 해놓고는 경쟁적으로 우리를 청하였다.


나는 오가자를 혁명화할 때 중국사람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였다. 중국인유지들을 쟁취하지 못하면 우리가 중부만주지방에 마음놓고 발을 붙일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설사 지주라고 하여도 포섭할 여지가 있으면 서슴없이 포섭하고 리용하였다.

그 당시 오가자근방에는 조가봉이라는 지주가 살고있었다. 그가 한번은 땅때문에 다른 고장의 지주와 싸우다가 그 지주를 재판에 걸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조가봉은 고소장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 애를 먹고있었다. 이 지주의 아들이 도회지에 가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그도 고소장을 쓸줄 몰랐다. 아마 그가 중학교를 다니였다고는 하지만 건달을 부리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조가봉은 오가자에서 한의노릇을 하던 김해산에게 고소장을 써줄 인물을 한명 물색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부탁을 받은 김해산이 하루는 나를 찾아와 고소장을 쓸줄 아는가고 물었다.

우리가 지하혁명활동을 하던 그 당시 중국에서는 일반주민들과 학생들의 편리를 위하여 편지, 제문, 고소장 같은것을 쓰는 방법을 서슬한 참고서들을 찍어냈다.

김해산을 따라 조가봉의 집에 가니 지주는 중국음식을 차려놓고 나를 잘 대접해주면서 땅때문에 재판을 걸게 된 사연을 장시간 이야기하였다.

나는 지주에게 중어로 소송문건을 써주고 현에까지 따라나가 그가 재판에서 이기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조가봉은 그 소송문건을 가지고 재판에서 이기였다. 그때 그가 재판에서 졌더라면 몇십정보의 땅을 떼웠을것이다.


그후부터 조가봉은 김선생이 공산당패라고 하는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김선생은 공산당패가 아니라 아주 좋은 사람이다, 김교사가 아니였더라면 재판에서 질번했다고 하면서 나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였다. 그 지주는 명절때마다 나를 초청하여 좋은 음식을 대접하군하였다.

나는 조가봉의 집에 갈 때마다 거기에 찾아오는 많은 중국인유지들과 낯을 익히고 그들에게 반제국주의교양을 하였다.


그때부터 오가자에서의 나의 혁명활동이 합법화되고 조선인학교의 운영이 합법화되였으며 이 일대에서의 우리의 혁명투쟁지반이 공고화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유지들을 돌려세운 다음 대중단체들을 혁명적으로 개편하는 사업에 달라붙었다.

먼저 청년회를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청년회도 처음에는 민족주의영향하에 있었다. 조선혁명군소조가 오가자에 간후 청년회의 핵심성원들이 좀 개명하였지만 아직 모든 면에서 민족주의적인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있었다. 우선 투쟁목적과 과업이 명백치 않았다. 회원수도 적거니와 사업방법도 옳게 서있지 않았다. 활동은 없고 간판만 있는 유명무실한 조직으로서 청년대중을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은 거의 하지 않고있었다. 오가자지구는10리, 20리, 지어는 60리 떨어져있는 마을들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청년회는 어느 한 마을에도 지부를 두고있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청년조직이 대중속에 발을 붙일수 없었고 청년대중을 움직일래야 움직일수가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청년회를 당장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하자고 하였다. 많은 청년들이 아직 민족주의자들의 영향하에 있고 또 청년회에도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있는 실정에서 그들의 정치사상적준비정도를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기성조직을 새 조직으로 개편하는것은 무리한 일이였다.


조선혁명군 대원들은 청년회간부들과 함께 여러 부락들에 나가 반제청년동맹을 내오기 위한 사상동원사업을 하였다. 그 과정을 통하여 자연히 우리의 혁명로선이 청년군중속에 침투되여갔다. 나도 매일같이 청년들과 담화를 하였다.

이런 준비단계를 거쳐 우리는 삼성학교 교실에서 오가자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동맹은 각 부락들에 지부를 두었다. 동맹위원장으로는 최일천, 조직부장으로는 문조양이 선거되였다.


그후에 농우회가 농민동맹으로 개편되고 소년학우회가 소년탐험대로 개편되였으며 남만녀자교육련합회 오가자지부가 부녀회로 개편되여 오가자대중단체들의 사업에서는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편후 각 조직들은 새 성원들을 많이 받아들이였다. 오가자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해당한 대중조직들에 망라되여 정치생활을 하게 되였다.


우리는 지방자체행정기관인 촌공회도 혁명적인 자치위원회로 개편하였다. 오가자의 선각자들이 촌공회를 내온것은 1920년대 전반기였다. 촌공회는 경제교육사업을 기본으로 하면서 중국관헌들과 상시적인 련계를 맺고 산하에 공주령도자판매소와 같은 기관을 두어 농민들의 생활상편의를 도모해주고있었다.


오가자사람들은 촌공회일군들이 군중성이 없으며 청백하지 못하다고 로골적으로 비난하였다.

나는 농민들과의 담화과정에 촌공회일군들이 공주령도자판매소로부터 들어오는 일부 식료품들과 생활필수품들을 농민들에게 골고루 배정해주지 않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면서 뒤로 빼돌리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사실여부를 확인하려고 공주령에 사람을 보냈더니 그도 돌아와서 촌공회가 썩었다고 하였다. 촌공회일군들이 농민들한테서 모은 돈을 람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고있는것이 사실이라고 하였다.


촌공회사업은 거의 촌장 혼자서 주관주의적으로 처리하고있었으므로 독단이 많이 작용하였고 대중의 의사가 무시되였다. 대중이 참견하지 못하다보니 촌공회안에 무슨 허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알수 없게 되여있었다. 사람도 생활도 일본새도 다 혁명적으로 개편되고있는 형편에서 종래의 조직기구와 고루한 사업방법을 가지고서는 촌공회가 대중의 요구에 맞게 사업할수 없었다.


우리는 촌공회간부들과 각 부락 툰장들, 농민동맹 위원장들이 참가하는 협의회를 열고 촌공회사업을 총화하였다. 그 협의회에서 촌공회를 자치위원회로 개편하였다.

자치위원회는 우리의 의도대로 주관과 독단을 없애고 민주주의를 최대한으로 발양시키는 방향에서 일을 잘해나갔다.


우리는 자치위원회산하에 있는 공주령도자판매소사업에도 큰 관심을 돌리였다. 오가자농민들이 쌀을 팔자면 마차나 소달구지를 끌고 100리밖에 있는 공주령에까지 가야 하였다. 쌀값이 떨어질 때에는 적당한 장소에 쌀을 보관해두었다가 값이 오를 때 파는것이 경제적이였다. 그런데 공주령에는 오가자의 농민들이 쌀을 맡길만한 장소가 없었다. 보관장소가 없었기때문에 값을 따지지 않고 아무데나 망탕 쌀을 팔아버리군하였다. 이런 페단을 없애려고 오가자의 농민들은 1927년 가을 공주령에 도자판매소를 설치하였다.


우리는 오가자의 대중조직성원들중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도자판매소에 파견하였다. 조선혁명군 대원들가운데서는 계영춘, 박근원, 김원우와 같은 사람들이 판매소사업을 도와주기 위하여 공주령에 파견되였다. 우리가 도자판매소를 장악한후 이 판매소는 농민들의 생활상 편의를 도모해주는 합법적상업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것과 함께 혁명조직들과의 련계를 보장해주고 조선혁명군에 활동자료를 대주는 공개되지 않은 사명까지 감당하였다.

우리가 촌공회를 자치위원회로 개편하고 그 산하에 공주령도자판매소와 같이 혁명을 돕는 합법적인 상업기관을 내온것은 1930년대초의 혁명투쟁에서 하나의 경험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오가자에 있을 때 만주의 여러 지역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조직들을 확대하고 활동판도를 넓혀나갔다. 그때 공작원들은 카이루(개로)지방에도 여러명 파견되였다. 《ㅌ.ㄷ》 출신이고 화성의숙 졸업생인 박근원도 그 일대에 가서 얼마동안 활동하였다.

카이루 지방에는 몽골족이 많이 살았다.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카이루사람들은 병이 나도 치료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신에게 빌기만 하였다. 그래서 우리 동무들은 그곳에 갈 때마다 약을 가지고가서 병난 사람들에게 주군하였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후부터 카이루지방에서는 조선사람들이 가면 대우를 잘 해주었다.


우리는 조직을 책임지고있는 사람들의 정치실무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각 조직의 책임자들과 핵심성원들을 망라하는 강습을 조직하였다.

나는 차광수, 계영춘동무들과 함께 매일밤 두세시간씩 엇바꾸어가며 카륜회의에서 제시된 주체적인 혁명로선과 전략전술적방침, 군중속에서의 정치사업방법, 조직을 확대하고 질적으로 강화하는 방법, 조직성원들에 대한 교양사업방법과 그들의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우리는 강습이 끝난후에도 조직책임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에게 조직을 내오는 방법, 핵심을 육성하는 방법, 분공을 주고 총화하는 방법, 회의를 진행하는 방법, 담화를 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사업방법을 배워주었다.


오가자의 지휘성원들은 신심을 가지고 군중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오가자인민들을 계몽하고 교양하는데도 많은 힘을 기울이였다.

우선 교육사업에 선차적인 힘을 돌리였다.

우리는 조선혁명군 대원들과 지하조직성원들가운데서 유능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삼성학교에 교원으로 배치하고 그들이 주동이 되여 학교의 교육내용을 혁명적으로 개편하게 하였다. 민족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하는 낡은 학과목들이 페지되고 정치과목들이 새롭게 선정된것도 우리가 직접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삼성학교에서 월사금이 페지된것도 이무렵이였다. 학교의 유지비는 자치위원회에서 대주었다. 취학년령에 해당하는 오가자의 모든 아이들이 그해 겨울부터 월사금을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우리가 후날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의무적인 면비교육에 대한 조항을 하나 넣기는 하였지만 사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무료교육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실천에 옮긴것은 고유수, 카륜, 오가자에서였다. 오가자의 삼성학교에는 카륜의 진명학교, 고유수의 삼광학교와 더불어 우리 나라 교육력사에서 첫 면비교육이 실시된 의의깊은 교육기관이였다.


우리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장년들과 부녀자들을 위해서 야학에도 힘을 넣었다.

나는 중심부락뿐아니라 주변부락들에도 야학을 내오고 거기에 모든 청년들을 다 망라시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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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리는 카륜에서《볼쉐위크》를 발간하던 경험을 살려 오가자에서도《농우》라는 잡지를 만들어냈다. 《농우》는 농민동맹기관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볼쉐위크》가 좀 리해하기 어렵게 씌여졌다면《농우》에 실린 글들은 농민들이 보고 쉽게 리해할수 있도록 문체도 간결하고 평이하였다. 《농우》도 《볼쉐위크》와 마찬가지로 간도에까지 배포되였다.

우리는 그때 학생들을 통하여 마을사람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를 많이 보급하였다. 《적기가》나《혁명가》와 같은 노래도 학교에 가서 한번만 배워주면 그날로 온 마을에 퍼지군하였다.
오가자에는 우리가 무어준 연예대가 있었다. 이 연예대가 계영춘의 지도를 받으면서 삼성학교를 거점으로 활동을 잘하였다.

나도 길림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시험적으로 몇차례 련습까지 해본 《꽃파는 처녀》의 대본완성작업에 달라붙었다. 대본이 완성되자 계영춘이 삼성학교에 조직되여있는 연극조성원들을 데리고 형상작업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10월혁명 13돐기념일에 삼성학교 강당에서 이 가극을 공연하였다.
이 가극은 해방후 오래동안 파묻혀있다가 1970년대초에 이르러 김정일동지의 지도밑에 우리 작가, 예술인들에 의하여 영화와 가극, 소설로 각각 완성되여 세상에 공개되였다. 김정일동지가 이때 수고를 많이 하였다.

우리는 오가자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성원속에서 짧은 기간에 료하농촌을 조선혁명군의 믿음직한 활동기지로 꾸려놓았다. 우리가 길림주변에서도 농민들과의 사업을 하고 장춘근방에서도 농민들과의 사업을 하였지만 오가자에서와 같이 그렇게 철저히 농촌을 혁명화해본적은 일찌기 없었다.
우리가 오가자에서 해놓은 모든 일에 대해서는 국제당련락원 김광렬도 경이적인 눈으로 보았다.

우리가 독창적인 혁명로선을 내세우고 자주적인 방법으로 혁명을 개척해나가다니니 국제당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주시하였다. 국제당 동방부에서 그 당시 우리에 대하여 많은 론의를 한것 같다. 조선에 종래의 공산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새 세대의 혁명가들이 나타났다.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소문도 내지 않으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세력인데 군중지반도 좋다고 한다. 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아마 이런 호기심에서 련락원까지 보낸것 같다.

김광렬은 할빈련락소에 갔다가 오가자에 와서 우리 동무들도 만나보고 혁명조직책임자들도 만나고 유지들도 만나보았다. 많은 사람들과 담화한후 나와도 만났는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고무적인 말을 많이 하였다. 그는 조선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운동과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독창적인 길을 개척하고있으며 그 과정에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아올렸다고 하면서 우리가 내놓은 혁명로선과 방침을 적극 지지찬동한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에 대하여 아주 놀랍게 생각하였다. 련락원은 지금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는 혁명의 지지자, 동정자를 규정하는데서 심각한 론의가 계속되고있는데 당신들은 완고한 민족주의세력들, 종교인, 지어는 자산층들과도 손을 잡으니 이것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고 물었다.

나는 련락원에게 소수 공산주의자들이나 로동자, 빈고농의 힘만으로는 혁명을 할수 없다, 일제를 타도하자면 중간세력까지도 다 동원하여야 한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조선에서는 대다수의 민족자본가들과 종교인들까지도 다 외세를 반대하고있다, 혁명을 달가와하지 않는 세력은 한줌도 못되는 지주, 예속자본가들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뿐이다, 나머지사람들은 다 동원하여 거족적인 항쟁을 조직하자는것이다, 조선사람의 힘으로 조선을 독립하는 비결은 반일을 하는 모든 세력을 다 쟁취하는데 있다고 말해주었다.

련락원은 그 설명까지 듣고나서 《당신은 고전에 구애되지 않고 만사를 독창적으로 처리하는데 나는 그것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모스크바류학을 권고하였다.
《당신은 전도가 양양한 사람인데 실천도 중요하지만 공부를 해야겠소.》
그때 김광렬은 나에게 양복과 와이샤쯔, 넥타이, 구두가 들어있는 트렁크까지 열어보이며 국제당에서 당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재삼 권고하는것인데 그 권고에 응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아마 그는 국제당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나를 설복하여 모스크바에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온것 같았다.

나는 김광렬에게 《당신들이 나에게 관심을 돌려주어 대단히 고맙지만 나는 동만에 나가 인민들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쏘련에 들어가서 흘레부를 먹게 되면 로씨야파가 될수도 있겠는데 나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조선에 엠엘파요, 화요파요, 서울파요 하는 파가 많아서 그러지 않아도 가슴아픈데 나까지 그런 사람들의 전철을 밟을수야 없지 않습니까. 맑스ㅡ레닌주의는 책을 보고 공부할 작정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차광수와 박소심을 비롯한 나의 동무들도 토로즈에서 류학에 필요한 생활필수품들을 다 꾸려놓고 나에게 모스크바에 가라는 권고를 한적이 있었다.
나는 그해 12월하순 오가자에서 조선혁명군 지휘성원들과 혁명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가 그 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카륜회의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달성한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고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일본은 군국주의쇠몽둥이를 휘두르며 국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하고 령토를 팽창하기 위한 침략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길에서 장애로 된다고 인정되는것은 가차없이 소멸하였다.
우리는 일본이 만주를 치기전에 동만에 나가서 진지를 차지하고 침략에 맞설 준비를 하려고 하였다. 동만으로 나가자면 중부만주지방에서의 활동을 총화하고 무장투쟁준비에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하였다. 그렇게 되여 소집한것이 오가자회의였다.

이 회의에 조선혁명군의 핵심성원들과 혁명조직책임자들이 다 참가하였다. 간도와 온성, 종성지구에서 채수항을 비롯한 많은 혁명조직책임자들이 령하 30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오가자로 찾아왔다. 서로 얼굴을 모르고 지내던 숱한 청년혁명가들이 이 회의를 계기로 면목도 익히고 정도 나누면서 조선혁명의 장래를 두고 진지한 토론을 하였다.

회의에서 초점을 두고 론의된것은 동만에서의 활동을 결정적으로 강화할데 대한 문제였다. 투쟁의 기본무대를 동만으로 옮기려는것은 우리의 확고한 지향이였다. 그것은 혁명앞에 도래한 정세를 보아도 미룰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오가자에 있으면서도 동만을 잊지 않고 동만으로 나갈 날을 초조하게 고대한것은 그때문이였다.

나는 회의에서 항일무장투쟁준비를 다그칠데 대한 과업과 국제혁명력량과의 련대성을 강화할데 대한 과업도 제기하였다.
회의의 전과정은 청년학생운동과 농촌지하운동으로부터 무장투쟁단계에로 이행하여 적들에게 결정적공세를 가하려는 우리의 결심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카륜회의가 무장으로 일제를 타승하고 조국을 광복하려는 조선민족의 의사를 집대성하였다면 오가자회의는 그 의사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항일대전의 마당에로 가는 지름길을 밝혀주었다.

오가자회의는 카륜회의로부터 1931년의 봄명월구회의와 송강회의, 겨울명월구회의를 거쳐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일제와의 결전장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우리의 청년학생운동은 193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무장투쟁단계에로 발전하게 되였다. 오가자는 여기에서 하나의 도약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수 있다.
내가 오가자를 떠날 때 문조양이 10리밖에까지 따라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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