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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2-3. 국제당의 련락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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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67회 작성일 16-04-1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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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제당의 련락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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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의 나날에 조선혁명을 자주적으로 이끄시는 한편 국제혁명력량과의 련대를 위해서도 많은 로고를 바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30년대말ㅡ1940년대초에 국제당이나 쏘련과의 련계가 심화되여 조선혁명의 국제적판도가 더욱 넓어지고 조중공동항일이 조선, 중국, 쏘련을 포괄하는 보다 높은 형태의 새로운 투쟁단계에로 발전하던 력사적시기를 두고 아래와 같은 회상교시들을 남기시였다.

 

우리가 여러해동안 두절되였던 국제당과의 련계를 다시 회복한것은 1939년이였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을 앞두고 모두가 새 솜옷들을 갈아입었을 때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그때 안도현 화라즈밀영에서 군정학습을 한창 하고있었습니다.

어느날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김일이 시꺼먼 다부산자를 입은 사람 셋을 묶어가지고 사령부로 데려왔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차림새와 행동거지가 하도 수상해서 체포했는데 산골농사군들 같지는 않고 일본놈들의 특무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몸에서는 권총과 쟁개비가 나오고 닦은 콩이 나왔습니다.

나는 그 세사람과 담화를 하였습니다.

우리 부대가 제2방면군 부대이고 내가 김일성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비로소 국제당련락원들이라고 자기네 신분을 밝히면서 성냥갑을 내놓았습니다. 성냥가치가 류달리 큰것으로 보아 만주나 조선에서 만든 성냥은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쏘련제 성냥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도 그것이 쏘련성냥이라는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세사람의 신분을 더 똑똑히 확인하기 위해 다른 증빙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작은 칼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그 작은 칼은 위증민이 국제당에 갈 때 접선암호용으로 보냈던것이였습니다.

수년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모진 풍상도 겪었지만 우리는 그 낯익은 손칼을 잊지 않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위증민에게 그 손칼을 주면서 모스크바에 가면 접선암호용으로 국제당에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제당에서 우리에게 사람을 파견할 때는 꼭 그 손칼을 주어 신분을 확인할수 있게 하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댔습니다.

김일소부대가 일본특무로 잘못 볼번했던 세사람이 국제당련락원들이라는것은 그 손칼만 보고서도 인정할수 있었습니다. 용무는 어떻든 국제당이 우리를 잊지 않고 련락원까지 보내준것은 반가운 일이였습니다.

남호두회의후 두절되였던 국제당과의 련계는 이렇게 되여 다시금 이어지게 되였습니다. 우리가 20여만 대적과의 결전을 앞두고 새로운 작전을 준비하고있을 때 국제당이 련락원들을 보내준것은 우리에 대한 고무로 되였습니다.

련락원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국제당이 우리에게 파견한 사람은 6명이였다고 합니다. 6명중 3명은 우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병이 나서 되돌아가고 자기들만 남았는데 돌아간 3명중에는 조선사람도 한명 있었다는것이였습니다.

국제당이 정확한 소재를 대주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연길쪽에 나가서 김일성부대를 찾아보라고 했기때문에 어림짐작으로 여기저기를 헤매다보니 날도 많이 가고 고생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쏘련에서 나올 때 략도도 가지고왔지만 우리 부대가 늘 류동하면서 활동을 하다나니 좀처럼 행적을 찾을수 없었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인민들까지 곁을 주지 않아서 우리와의 접선을 포기하고 쏘련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안도현 3도구마을에 들렸을 때 어떤 사람이 화라즈쪽으로 가보라고 귀띔해줘서 이렇게 오게 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세사람은 산전막에서 자다가 화재까지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화재바람에 옷들을 태우고 식량까지 거덜나서 닦은 콩으로 겨우 끼니를 에웠는데 화라즈에서도 우리를 만나지 못하면 임무를 포기하고 철수하려고 했다는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자기네는 만주땅에 들어선 첫날부터 난바다 한복판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의 심정이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행로가 복잡하고 고립무원했다는것입니다.

나는 세 련락원에게 새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히고 필요한 일용품도 일식으로 공급해주도록 하였습니다. 새옷을 입고 요기를 한 그들은 사령부천막에서 오래간만에 마음을 푹 놓고 휴식하였습니다.

 

주체28(1939)년말에 국제당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에 련락원들을 보낸 사실을 두고 일제의 관헌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강덕6년(1939년) 10월 11일 김일성비가 화룡현 삼도구 서북쪽 침봉밀림속에 있을 때 공비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권총을 휴대한 로씨야인 8명이 조선인통역 두사람과 함께 김일성을 찾아와서 중요담화를 했다. 그때 중요간부이외에는 누구도 곁에 접근시키지 않고 약 10일간 머물러있은 다음 김일성비단가운데서 허약자 12명을 데리고 떠나간 사실이 있다. 그 로씨야인은 쏘련에서 련락원으로 온 사람들이라 하며… 상세한것은 명확치 않으나 직접 쏘련에서 중요한 사명을 띠고 련락을 온것이 아닌가고 보아진다.》[훈춘령사 기우찌의 보고, 소화15년(1940년) 7월 26일]

《다음으로 당의 지도에 대한 령도로선문제인바 이것은 작년(1939)12월 쏘련에서 직접 제1로군에 4명의 련락원을 보내왔는데 그 련락내용과 목적은 아직 전혀 알지 못하고있다. 단지 이러한 사실은 금년(1940) 1월 22일 무송에서 압수한 위증민이 양정우앞으로 보낸 서신속에서 그 점에 대하여 명백하게 쓰고있으며 경로는 돈화에서 대포시하에로 들어오고 다시 량강구를 거쳐… 왔다는것이 분명하다.》[《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동향》, 《사상월보》 제77호, 사법성 형사국, 소화15년(1940년)11월]

 

그때 국제당에서 우리에게 보낸 련락내용은 짤막한것이였는데 다음과 같은 두가지 문제였습니다. 하나는 국제당이 소집하는 만주빨찌산지휘관들의 회의에 조선인민혁명군과 1로군에서 대표를 파견해달라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동북의 항일유격부대들이 당분간 대부대활동을 고려하는것이 어떻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그 당시 국제당과 쏘련은 동북항일유격운동의 발전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고있었습니다. 1930년대말의 항일련군운동 자체실정을 보면 그 내부가 좀 순편치 않았습니다. 북만과 길동지구에서 활동하고있던 제2로군과 제3로군사이에서는 지도와 련합문제를 비롯한 몇가지 면에서 일정한 의견상이가 있었습니다.

이 의견상이를 해소하기 위해 국제당사람들은 제2로군과 제3로군의 대표들과 함께 쏘련에서 필요한 협의를 하였습니다. 협의를 거듭하는 과정에 그들은 북만과 길동 지구의 항일련군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김에 조선인민혁명군과 남만의 1로군대표들까지 데려다가 보다 넓은 범위에서의 협의를 마련함으로써 전동북적판도에서 항일혁명의 고조를 이룩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뿐아니라 만주빨찌산운동을 쏘련의 극동정책에 조화시켜나가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물론 국제당에서 파견되여온 련락원들이 우리에게 이런 내막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준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동에 조성된 군사정치정세라든가 그 당시 쏘련과 국제당이 실시하고있던 일련의 정책으로 보아 그런 판단은 십분 가능한것이였습니다.

그런데 나나 양정우나 위증민은 유격전구를 떠날수 없는 몸이였습니다. 적의 대《토벌》이 눈앞에 박두하고있는 때에 우리가 부대를 두고 쏘련으로 들어가버리면 새 작전 수행에 막대한 후과를 미칠수도 있고 대원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줄수 있었습니다.

대부대활동을 고려해달라는 국제당의 건의도 무작정 받아들일수는 없었습니다. 대부대활동을 중단하는 경우 그것이 결국 소극적인 분산도피로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도 심중하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였습니다.

나는 국제당련락원들에게 국제당의 두가지 요구와 관련된 우리의 립장을 상세하게 설명해준 다음 그들중에서 한사람인지를 위증민에게로 보냈습니다. 《만강》이라는 대호를 가진 사령부통신원이 그를 안내하였습니다.

국제당련락원들이 화라즈밀영을 떠나갈 때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내용을 수록한 문건들과 사진자료들을 보냈습니다. 문건들과 사진자료들을 쏘련에 보관해두면 안전할수 있었고 우리의 부담도 덜수 있었습니다.

그때 보낸 문건들과 사진자료들은 한배낭 정도 되였습니다. 내가 안경을 끼고 림강현 5도구밀영에서 찍은 사진도 그때 보냈습니다.

쏘련으로 돌아가던 국제당련락원들은 불행하게도 화룡현 어느 지방에서 철길을 건느다가 자위단놈들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다나니 문건들과 사진자료들이 국제당에 가닿지 못하고 고스란히 적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찍은 사진자료들이 일제의 관헌기록들에 나오는것을 보면 국제당련락원들이 쏘련으로 들어가다가 잘못된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우리한테 왔던 국제당련락원들중에 닌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사람도 있었습니다. 위증민이 국제당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닌이 적들과 교전하다가 부상당하였다는것이 밝혀져있습니다.

국제당의 두가지 요구와 관련된 위증민의 견해는 우리의 견해와 일치하였습니다.

우리가 국제당과 련계를 가지기 시작한것은 1930년대초부터입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우리와 국제당과의 련계가 비교적 괜찮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영구회의에서 락착을 보지 못한 반《민생단》투쟁과 관련된 의견상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위증민이 모스크바에 다녀온 1936년초부터 1939년 가을까지는 우리와 국제당사이에 래왕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도 국제당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국제당도 우리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 당시 국제당에 찾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장래운명과 관련되는 중요한 로선상 문제가 공명정대하게 해결된 이상 남호두회의에서 채택된 방침대로 혁명을 계속해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명백한 로선을 가지고 혁명을 추진시켰으며 백두산을 타고앉아 국내에로 무장투쟁을 확대해나갔습니다. 모든 로선과 정책을 자주적으로 세우고 그것을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풀어나가는것은 우리의 시종일관한 립장이고 투쟁기풍이였습니다. 부족한것도 많고 곤난도 한두가지가 아니였지만 조선공산주의자들은 그 모든것을 자체로 극복해나갔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쓸데없이 손을 내밀거나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항일혁명시기부터 혁명의 자주적로선을 확고히 견지해온 력사적전통과 경험이 있었기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자주성이 강한 당, 자주성이 강한 민족, 자주성이 강한 나라로 되고있습니다.

세계에는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유격전을 벌린 나라도 많고 정규무력에 의한 현대전을 벌린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처럼 어려운 조건에서 무력항쟁을 벌린 실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늘 국가적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15성상 싸웠다고 하는 말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조선혁명의 간고성을 말해주는 사실 그대로의 표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유고슬라비아빨찌산이 잘 싸웠다는것은 우리도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가 독일군에 의해 강점된것이 1941년 4월이니 그 나라 빨찌산력사도 몇해밖에 되지 않습니다. 찌또가 빨찌산투쟁을 시작하던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에는 정규군의 그루터기가 적지 않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유고슬라비아빨찌산은 쏘련사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쥬꼬브의 회상록을 보면 쏘련은 이 나라에 보총이나 기관총과 같은 경무기만 해도 수십만정 보내주었다고 서술되여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빨찌산은 쏘련사람들한테서 대포나 땅크와 같은 중무기도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인민이 벌린 항일전쟁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수 있습니다.

장개석의 수하에 수백만의 대군이 있었는데 그 대군이 순수 반공만 했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비록 소극적이고 어정쩡하기는 했지만 반일의 기발을 든것도 사실이고 일본군과 교전을 한것도 사실입니다. 장개석군대가 조금이라도 일본군을 견제했다면 그것은 중국인민이 벌린 유격전쟁에 대한 정규군의 지원으로 된다고 보아야 하는것입니다. 국공합작이라는 말자체가 공동항일을 의미하는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정규군이 그 존재를 끝마친것은 1907년입니다. 우리는 그때로부터 20년이상이나 지난 때에 무장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무장투쟁을 시작할 때에는 정규군은 고사하고 그 그루터기조차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국가적후방에 대해서는 더 말할나위조차 없었습니다.

의병이나 독립군들이 쓰던 총이 몇자루 있었다고 하지만 다 낡아버린 구식이고 그것마저 녹이 쓸어서 사용할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총 한자루한자루를 목숨과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우리가 무장투쟁을 벌리면서 당한 어려움, 우리 유격대원들이 10년가까이 산에서 겪은 고초를 다 말하자면 정말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남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전에도 여러번 말했지만 국제당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큰 나라 혁명에는 관심을 많이 돌리면서도 조선혁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주의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국제당에 앉아있던 일부 사람들은 조선혁명을 중국혁명이나 일본혁명의 부속물처럼 보았습니다.

같은 중국혁명인 경우에도 관내의 혁명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돌렸지만 동북혁명에 대해서는 왼눈으로 보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국제당이 국민당을 위해서 보로진이나 브륙헬같은 사람들을 고문으로 보내주었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공산당을 위해서는 보이찐스끼, 마린, 옷토 브라운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동북혁명을 위해서는 한사람의 고문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동북혁명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면 제2로군이나 제3로군에 치중했을뿐입니다. 쏘만국경에서 멀리 떨어진곳에서 싸우고있던 조선인민혁명군이나 남만의 제1로군에는 거의 낯을 돌리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할것입니다.

국제당이 동북혁명을 경시한 사실은 그들이 쏘련에 데려다가 공부시킨 만주출신 지휘관들을 대부분 동북에 돌려보내지 않고 관내로 보낸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유격구시절에 간도에서 우리와 함께 공동투쟁을 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참모장 류한흥이나 제5군의 리형박은 다 쏘련에서 학교를 마친후 출신지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연안에 배치되여갔다가 일제가 패망한 다음에야 동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동북혁명이 마치도 쏘련이나 국제당의 지원밑에서 전개된것처럼 쓰고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억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때 일본사람들은 내가 모스크바의 공산대학에서 훈련을 받은후 1938년 여름에 쏘련으로부터 정예부대를 이끌고 만주에 들어왔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일본의 어떤 관헌기록들을 보면 내가 상당히 오랜 기간 쏘련에 들어가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지원을 받은 다음 만주로 돌아왔다고도 하였고 장고봉사건이후 만주에 돌아와 동변도에서 맹위를 떨치고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선전의 목적은 우리를 쏘련이나 그 어떤 외부세력의 사촉과 조종밑에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묘사함으로써 국내인민들에게 미치는 우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말살시키려는데 있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그 당시 쏘련이나 국제당의 신세를 별반 지지 않았습니다. 왕청에 있을 때 수류탄공장을 하나 지어달라는 편지를 쏘련에 보낸적이 있었는데 상대측에서는 회답조차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길폭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탄을 자체로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동북혁명이나 조선혁명에 어딘가 랭담하고 무관심했던 국제당이 어떻게 되여 1939년에 이르러서는 련락원을 보내여 우리를 쏘련에 초청하는 이례적인 조치까지 취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변화는 일본의 대쏘침략이 기정사실로 되고있던 쏘련의 군사정치정세의 요구로부터 이루어진것이라고 평할수 있습니다. 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을 통하여 일제의 령토팽창야욕과 강도적본성을 다시한번 충분히 엿보게 된 쏘련은 그들이 어느때든지 《북공》을 단행하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으며 국제당과 함께 그에 대처하기 위한 방도를 각방으로 모색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국제당이 특별히 중시한것은 쏘련을 익측과 배후에서 무장으로 지원할수 있는 동맹자들을 찾아내고 그 동맹자들과의 군사정치적련합을 실현하는 문제였습니다. 동방에서 쏘련을 무장으로 도와줄수 있는 존재란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밖에 없었습니다. 국제당은 동북에서의 항일무장력량을 쏘련원동군의 일익으로, 그의 외선세력으로 보면서 일단 유사시에는 쏘련원동군무력의 별동대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쏘련도 물론 같은 립장이였습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동북항일운동의 존재에 대해서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던 쏘련사람들은 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때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자기네 나라를 옹호해서 강력한 배후공격작전을 벌리는것을 보고서야 만주빨찌산이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것을 알게 된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우리와의 뉴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습니다.

국제당도 이에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모든 사업을 쏘련옹호의 선에서 추진시키는것은 국제당의 기본사명인 동시에 시종일관한 정책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동북항일력량에 대한 국제당과 쏘련원동군사당국의 견해가 처음부터 완전히 일치하였다는것은 아닙니다. 만주빨찌산에 대한 국제당의 립장은 전시가 도래할 때까지 력량보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것이였고 원동군사당국의 립장은 중국전체가 이미 전시상태에 들어갔고 희생은 불가피한것만큼 일본병력이 중국본토에로 이동하지 못하게 강한 군사적공세를 취해야 한다는것이였습니다.

어쨌든 국제당이 종전보다 동북항일운동에 더 낯을 돌리고 중요한 전략전술의 협의를 위해 우리를 쏘련에 초청한것은 주목할만한 정책변화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적의 배후에서 쏘련을 무장으로 지원할수 있으리만큼 강력한 력량으로 자라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국제당의 요구를 보류하고 대부대활동을 중지하지도 않았으며 쏘련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주에 그대로 틀고앉아 우리가 이미 설정한 시간표대로 대부대선회작전을 결단성있게 내밀어 적의 공세를 여지없이 짓부셔버렸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을 승리적으로 결속함으로써 우리는 피동이 아니라 주동에 서서 새로운 투쟁방침을 세워나갈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국제당의 요구대로 하바롭스크에 들어갔거나 소부대활동에로 인차 넘어갔더라면 대부대선회작전과 같은 큰 작전은 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주체29(1940)년 가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국제당이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해달라는 통지를 받으시였다. 국제당이 파견한 사절들이 사선을 헤치고 그이를 찾아왔다. 그때를 두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내가 국제당의 련락을 다시 받은것은 1940년 10월중순이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부대들이 소할바령회의방침에 따라 도처에서 소부대활동을 벌릴 때입니다.

국제당에서 파견한 련락원 2명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 련락원들의 말이 자기네를 파견한 사람은 원동군사령부에 있는 류쉔꼬장령인데 그가 국제당의 명의로 전달하라고 한 사항은 12월에 하바롭스크에서 국제당이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해달라는것이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는 모든 항일무장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가며 원동에 기지를 정하고 력량을 수습재편성할수 있도록 조속히 들어오라는 국제당의 지령도 동시에 전달하였습니다.

류쉔꼬는 원동군사령부에 있으면서 국제당이 주관하는 일을 맡아보았습니다. 그후 하바롭스크에 들어가서 그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만나자 이거 김일성동지의 손을 잡아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하면서 우리와의 련계를 짓기 위해 소부대와 소조들을 파견하던 경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첫 대면부터 상대의 마음을 잡아끄는 열정과 친화력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습니다.

류쉔꼬는 흔히 왕신림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였는데 주로 국제당이나 쏘련과 우리 사이에 련계를 지어주는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련락원들의 말에 의하면 1940년초에 국제당이 하바롭스크에서 소집하려고 했던 만주빨찌산지휘관들의 회의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제1로군 대표들이 참가하지 않았기때문에 북만과 길동지구 빨찌산대표들만 참가한 회의로 되고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제당은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동북의 모든 항일무장부대 지휘관들의 회의를 기어이 소집하여 동북항일운동의 발전방향도 토의하고 쏘련이 당하고있는 국난도 타개하려고 하였습니다.

련락원들이 우리에게 와닿은것은 10월이지만 국제당이 회의소집과 관련한 통지를 보낸것은 1940년 9월이였습니다. 그 통지가 제2로군과 제3로군에는 전신으로 전달되였지만 무선통신체계가 없던 우리에게는 련락원들을 통해 전달되였습니다. 국제당이 하바롭스크회의에 참가하라고 지정한 대상은 각 로군의 총지휘, 정치위원, 당서기를 비롯한 주요군정간부들이였습니다.

나는 위증민에게 국제당에서 련락원이 왔다는것을 통보해주고 그에 공동으로 대처할것을 제기하였습니다.

위증민은 국제당에서 주관하는 회의인것만큼 가기는 가야겠으나 건강이 허락치 않아 자리를 뜰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국제당에 가면 조선인민혁명군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과 남만성위도 대표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소부대활동과 관련된 국제당의 요구는 우리가 이미 소할바령회의에서 채택한 소부대활동방침과도 일치하였습니다.

이 시기 군사정치정세는 우리가 1939년말ㅡ1940년초에 대부대활동을 벌리던 시기보다 훨씬 더 엄혹했습니다. 말하자면 대부대로 와와 밀려다니기가 곤난한 때였습니다.

우선 적들이 집단부락화를 완성한 때여서 대부대의 식량을 보장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한줌의 쌀, 한개의 강낭떡을 위해 피를 흘리는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우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매번 식량을 해결하군하였습니다.

적들은 그 당시 치본공작과 사상공작에 특별한 힘을 넣고있었습니다.

그때의 집단부락정책은 종전에 우리가 서간도에서 보던 집단부락정책보다 훨씬 더 악랄한것이였습니다. 적들은 산재가옥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무장부락》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비민분리》를 강행하면서 식량, 물자, 탄약 등에 대한 통제와 《통비》분자들에 대한 색출, 검거, 도하장경비를 강화하였습니다. 밀작아편에 대한 단속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난민구제》요, 《민생공작》이요 하고 떠들면서 혁명군중과 인민들을 사상적으로 와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경험은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가면 대부대활동을 할 때보다 식량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데서 식량문제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식량이 1차이고 그 다음이 전술이였습니다. 먹지않고서야 싸울수 있습니까. 내가 의식주라는 말대신에 식의주라는 말을 사용하는것은 빨찌산시절에 식량고생을 많이 한 체험의 반영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원동에 드나들면서 소부대로 움직이면 인민들속에서 정치공작을 하기도 편리했고 부대의 간부들을 훈련시키고 양성하는 사업도 잘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여름철에는 군사활동을 벌리고 겨울철에는 쏘련이 알선해주는곳에 가서 군정훈련을 할수 있는 시공간적여유도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력량을 보존하고 육성하는 의미에서도 유리하다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말과 1940년대초에 우리는 적의 대《토벌》로 하여 많은 간부들을 잃었습니다.

나는 국제당련락원들에게 우리가 이미 항일무장투쟁발전자체의 요구로부터 소할바령에서 회의를 열고 력량보존과 소부대활동에로 이행할데 대한 방침을 채택한데 대해서 통보해주고 쏘련으로 들어오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앞으로 고려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이 이를 악물고 우리를 괴멸시키려고 하는 조건에서 우리가 대오를 수습하고 재편성할수 있는 시간적여유와 공간적지대를 확보하는것은 무장투쟁의 현재를 위해서뿐아니라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로 될수 있었습니다. 력량을 보존하고 육성하자면 그런 안정된 기지가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시기에 와서 력량보존문제에 대해 주의를 많이 돌리게 된것은 조선혁명의 최후승리의 날이 바야흐로 가까와오고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있었기때문입니다.

1940년 하반년에 와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전구라파를 휩쓸었습니다. 쏘련과 독일사이에 전쟁이 촉발하리라는것은 누구나 다 예상하고있는 문제였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결속짓지 못한 상태에서 남방을 겨냥한 또하나의 다른 전쟁을 계획하고있었습니다. 일본이 미, 영을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또 도발한다면 그런 모험이 어떤 결과로 끝나겠는가 하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것이였습니다.

이런 정세하에서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력량을 보존확대강화하는것이 상수였습니다. 우리의 이런 견해는 쏘련이나 국제당 사람들이 생각하고있는바와 기본적으로 일치하였습니다.

쏘련이 자기 경내에 우리가 력량을 수습하고 재편성하며 대오를 보존확대할수 있는 기지를 마련해주고 필요한 군사적, 물질적 지원을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쏘련으로 들어가는것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문제인만큼 심사숙고해야 했습니다. 우선 원동으로 들어가는 경우 얼마동안 체류하는가 하는것이 문제였습니다. 얼마간 있다가 나오는가, 아니면 오래 머무르게 되는가, 원동에 기지를 정하고 장기적으로 머물러있는 경우 무장투쟁을 어떤 방식으로 계속할수 있겠는가, 필요한 때 우리가 국내나 만주로 마음대로 진출할수 있겠는가, 국내운동에 대한 지도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고 그에 따르는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부터 나는 원동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몇가지 경우로 갈라서 고찰하고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첫째 경우는 주력은 현재의 위치에 남겨두고 지휘관들만 들어가서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 본래의 위치에서 투쟁을 계속하는것이고 두번째 경우는 지휘관들만 먼저 들어가서 회의에 참가한 다음 적당한 시기에 그곳 실정을 보아가며 부대를 쏘련경내에로 불러들이는것이며 세번째의 경우는 회의에 참가하는 문제와 쏘련경내에로 들어가는 문제를 시간적으로 일치시켜 우선 잠정적으로 그곳에 머무르면서 차후대책을 세우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장차 원동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도 백두산지구에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들을 더 잘 보강하는 전제우에서 쏘련경내에 새로운 기지를 창설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니 시간이 요구되였고 보다 상세한 정황파악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원래 소할바령회의방침에 따라 우리가 장악하고있던 지역을 무대로 하여 소부대활동을 하면서 한해 겨울을 나기로 하고 그 준비를 다그쳐왔습니다. 그런데 중도에서 그것을 집어던질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분석과 판단으로부터 나는 국제당의 요구에 대한 대답을 뒤로 미루고 쏘련에 먼저 들여보낸 사람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조사하여 우리에게 련락하게 하는 한편 본래부터 추진시키던 겨울나이준비를 계속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리룡운에게 과업을 주어 쏘련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통로를 개척하게 하는 한편 그전부터 리용해온 통로의 정확성과 안전성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리룡운은 제3방면군에서 싸움군으로 소문난 련대장이였습니다. 그는 1939년 8월에 있은 안도현 대사하, 대장강 전투에서 전동규가 전사한후 그 후임으로 련대장이 된 사람입니다.

리룡운은 원래 국제당에 보내는 위증민의 편지를 가지고 쏘련으로 가게 되여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정이 생겨 가지 못하였습니다.

리룡운은 허우대가 커서 나이보다 퍽 숙성해보였습니다. 그는 입이 무겁고 진중한 사람이였습니다. 평소에는 온화했지만 일단 전투장에만 나서면 용맹스럽고 날파람있었습니다.

그의 부대가 돈화현에 있는 어떤 집단부락을 습격할 때였다고 합니다. 행군중에 있던 부대는 식량이 떨어져서 집단부락을 하나 치기로 하고 먼저 정찰병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정찰병들은 마을에 3명의 적밖에 없다는 적정자료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기관총분대가 마을에 들어가서 적들을 소멸하기로 하였으나 리룡운은 그까짓 세놈때문에 기관총분대까지 데리고가겠는가고 하면서 자기가 전령병을 데리고 먼저 적을 제압할테니 신호를 하면 마을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전령병은 태병렬이였습니다.

밤이 되자 리룡운은 전령병 한사람만 데리고 집단부락에 내려가 곧장 병영으로 찾아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방안에서는 30여명이나 되는 장교들이 둘러앉아 작전토의를 하고있었습니다. 군용지도를 짚어가며 훈시를 하던 우두머리장교가 방안에 들어서는 리룡운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리룡운을 따라 방안에 들어갔던 태병렬은 후날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살아돌아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리룡운은 태연히 싸창을 꺼내며 너희들은 포위되였으니 손을 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우두머리장교는 악 소리를 지르면서 리룡운의 싸창을 거머잡았습니다. 리룡운은 방아쇠를 잡아당기였으나 불발이였습니다. 그는 싸창을 왈칵 나꿔챘습니다.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왜놈장교는 손바닥이 째여지면서 잡았던 총신을 놓치고말았습니다.

리룡운은 싸창에 다시 장탄하여 그 장교를 쏴 제끼고 저항하는 장교들을 발길로 차서 쓰러뜨리며 단신으로 적들을 제압해버리였습니다. 여러명의 장교들이 그가 쏜 총탄에 맞아 즉사하였습니다.

태병렬은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문가에 서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병렬이, 벽을 지키라!》하는 리룡운의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자기가 등지고있는 벽에 주런이 걸려있는 수십자루의 권총을 보았습니다.

리룡운은 태병렬을 시켜 그 권총들을 모두 거두게 하고 살아남은 장교들을 생포하였습니다. 그날밤 그는 태병렬과 함께 유격대《토벌》에 나갔다가 돌아온 수많은 적사병들까지도 모조리 생포하였습니다.

리룡운은 액목현성습격전투와 대사하, 대장강 전투, 요차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에서 용감무쌍하고 과단성있고 재능있는 지휘관으로 이름을 날리였습니다.

내가 리룡운련대장에게 임무를 준곳이 소할바령어귀일것입니다. 리룡운을 만날 때 임철도 같이 만났습니다. 리룡운에게 쏘련으로 드나드는 련락통로를 잘 개척해놓으라고 했더니 그는 념려말라고 하였습니다.

림춘추와 한익수가 부상자와 허약자들을 이끌고 쏘련쪽으로 떠나간것은 리룡운과 임철이 쏘만국경쪽에 가서 통로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그렇게도 걱정했던 부상자와 허약자들은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닿았는데 특사로 떠나갔던 리룡운만은 일본군과의 싸움끝에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그는 통로개척과 관련된 임무도 정확히 수행하였고 그 통로를 타고 부상자들을 쏘련으로 들여보내는데도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수행해야 할 나머지 과업은 쏘련에 들어가서 우리에게 그곳 형편을 전해주는것이였습니다. 리룡운은 그 과업을 위해 국경쪽으로 가다가 대원들의 옷차림이 람루한것을 보고 사령부의 위임을 받고 쏘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허줄해서야 체면이 서겠는가고 하면서 이전부터 련계를 가지고있던 숯구이막주인을 통해 옷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숯구이막주인이 나쁜놈이였습니다. 그는 혁명을 하다가 변절하여 적의 밀정으로 된자였습니다. 그가 옷을 사온다고 리룡운을 속여넘기고 100여명이나 되는 적을 끌고왔습니다. 리룡운은 혼자서 수십명의 적을 쓸어눕히고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몇해를 두고 단절되였던 국제당과의 련계는 이렇게 다시 회복되였습니다.

그후에도 나는 국제당과의 련계를 밀접히 가지였고 국제혁명력량과의 련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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