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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8-5. 9월 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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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111회 작성일 15-11-24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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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월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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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9월 우리는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나자신도 직접 국내로 들어갈것을 결심하였다. 로동계급의 대부대가 집중되여있는곳에 가서 전민항쟁준비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였다. 첫 목적지는 함경남도 신흥지구, 두번째는 풍산지구였고 수행성원은 10여명이였다.

조국땅이 위험한 적구로 되여있던 그 시기에 얼마 안되는 호위대원들을 데리고 국내종심깊이 들어간다는것은 사실 조련한 일이 아니였다.

우리 군정간부들은 나에게 국내에로 들어가는것을 부디 삼가해달라고 여러번 간청하였다. 내가 양복차림을 하고나서자 《대통령감》은 사령관이 그런 행색을 하고 함흥근처에까지 들어가다니요, 적들의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한사코 만류하였다.

하지만 나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 당시 내 심리에는 김주현이네 소부대의 국내공작실패로부터 오는 손실을 만회하려는 강한 모대김이 깔려있었다.

나는 9월호소문의 요구를 자기자신에 대한 요구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였다.

내가 국내깊이에로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제일 난처해한것은 김주현과 그와 동행했던 소부대성원들이였다. 김주현은 마치 자기네 소부대가 대사를 망쳐놓았기때문에 사령관이 직접 국내공작을 하려고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하기는 노여움도 전혀 없은것은 아니였다.

9월에 발표하였다고 하여 9월호소문이라고 불리우는 그 호소문에서 우리는 크게 두가지 문제에 의의를 부여하였다. 9월호소문에서 중요하게 제기한 문제의 하나는 중일전쟁과 조선혁명과의 호상관계에 대한 옳은 인식을 줌으로써 우리 인민이 신심을 잃지 않고 반일투쟁을 강화해나가도록 하는것이였다.

당시 신문깨나 보는 사람들중에는 중일전쟁이 심화되고 일본군의 전과가 확대되여가자 조선독립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관론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해 8월초부터 최남선, 윤치호, 최린 등의 이른바 저명인사들은 내외신문들에 일제와의 타협을 설교하는 글들을 련속 발표하였다.

그 글들을 우리도 읽어보았다.

최남선은 일본의 존재와 그 발흥은 곧 아세아의 기운이요, 동방의 빛이라고 하면서 동방제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대동단결하여야 한다고 썼다.

3.1독립선언문 기안자의 한사람인 최남선은 일찌기 백두산을 동방만물의 최대의지, 동방문화의 최요핵심, 동방의식의 최고연원이며 동방대중의 원척이며 그 활동의 주축이라고 하면서 동방의 풍운치고 그 기류의 동원이 백두산에서 발하지 않은것이 없다고 하였다. 언제 아무데서고 이마를 스치는것은 백두산의 바람이요, 목을 추기는것은 백두산샘물이요, 갈고 심고 거두고 다듬는것은 백두산의 흙이라 하였다. 그러던 사람이 돌변하여 일본의 존재가 아세아의 기운이고 동방의 빛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최린은 내선일체로 《국민적적성》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3.1독립운동발기자 33인에 속하는 사람의 발언치고는 너무도 배신적이고 매국적이였다.

윤치호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배를 탄 동일운명에 처해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의 근대력사에 밝은 사람들은 구한국시대의 고관이였던 윤치호를 잘 안다. 그는 높은 관직을 가지고있던 사람이였으나 《한일합병》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감옥밥도 먹어보았다. 7.7사변당시 이 인사는 칠순을 넘긴 고령이였다. 이런 늙은이가 그 무슨 영달을 바라거나 목숨이 아까와 새삼스레 일제에게 아부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 늙은이는 해방이 되자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볼수가 없어 80이 넘은 나이에 자살하였다고 한다. 자결로써 자기의 치욕을 씻으려고 한것을 보면 그가 량심인이였던것이 틀림없다. 그런 사람이 왜적에게 전향하게 된것은 일본을 과대평가했던데다가 정세의 추이를 잘못 판단한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신흥지구로 진출할 때 삼수근방에서부터 길안내를 한 장해우도 중일전쟁의 전도에 대하여 매우 궁금해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중일전쟁을 근시안적으로 보면 절망할수 있다, 중일전쟁은 탐욕스러운 일본군국주의로 하여금 스스로 광대한 지역에 병력을 널어놓지 않을수 없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병력난, 물자난, 보급난, 원료난으로 허덕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것이다, 따라서 중일전쟁은 우리 인민의 독립전쟁에 절망이 아니라 밝은 전망을 열어주고있다, 다시말해서 목적달성의 절호의 기회를 주고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제와 결사전을 벌릴수 있는 거족적인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9월호소문에서 중요하게 제기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전민항쟁준비의 전략적방도를 밝혀주는것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문에 중일사변은 더욱더 긴장한 성격을 띠고있다, 종국적승리가 중국에 있게 되리라는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있을수 없다, 우리는 이보다 더 유리한 기회가 있을수 없기때문에 일단 유사시에 가장 단호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후방에서 무장폭동과 파괴공작의 실현을 위한 전위적집행조직으로서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하는것은 특별히 중요하며 긴요하다,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는 자기 조직의 성원들을 동원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며 후방에서 파괴공작을 조직하며 군수공장들과 기타 중요한 기업소들을 방화 및 파괴하며… 전인민적인 항쟁시기가 도래할 때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행동에 합세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일본군대를 완전히 패배시켜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우리의 과업 즉 조선독립을 달성할수 있다는 내용들을 박아넣었다.

우리는 9월호소문에서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중심으로 전민항쟁준비를 확대해나가는것을 전략적방침으로 제시하였다.

우리가 9월호소문을 발표한 이후 국내진출의 첫 목적지로 신흥지구를 선택한것은 바로 이 지구가 함흥, 흥남 등 우리 나라 로동계급이 가장 많이 집결되여있는 큰 공업도시들을 끼고있기때문이였다.

우리 정치공작원들에 의하여 부전령산줄기 남쪽기슭에 위치한 신흥지구의 울창한 수림속에는 이미 여러개의 밀영들이 꾸려져 소부대의 활동거점으로 리용되고있었다. 그 밀영들중의 어느 한곳에 흥남지구를 비롯한 동해안 각지에서 활동하는 정치공작원들과 로조, 농조 핵심성원들이 모이게 되여있었다.

우리가 제2목적지로 풍산지구를 선택한것은 그 지구에 수전공사장 로동자들과 조국광복회 조직에 망라된 천도교인들이 많이 살고있기때문이였다.

신흥을 거쳐 풍산에까지 가야 했으므로 지도상에서 직선거리로 타산해도 우리가 가야할 로정은 800리가 넘었다.

우리는 9월호소문을 등사하여 김봉석의 배낭속에 넣고 떠났는데 그것을 장해우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장해우는 우리가 삼수부근의 청산령중턱에서 휴식하는 사이에 호소문을 몇번 반복해 읽고나더니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 조직문제를 중요하게 내놓은것이 특히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원산총파업만 보아도 로동계급은 정말로 단결력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1929년의 원산총파업에서 특기할 점은 로동계급의 단결력과 전투력이였으며 련대적인 협조정신이였다.

원산총파업이 있은 다음해에 신흥탄광 로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후에도 조선각지에서 로동자파업은 해마다 계속 되였다.

그러나 그 대중적파업투쟁은 거의다 요구조건을 관철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였다.

우리는 9월호소문을 작성할 때 과거 로동운동의 경험중에서 장점은 취하고 약점은 퇴치하는 방법으로 로동운동의 새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더는 쓰라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인 산업로동이 발생한것은 19세기말엽 개방정책의 흐름을 타고 외국자본이 쓸어들어오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우리 나라 산업로동의 시초를 18세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때는 근대산업이 아직 맹아적형태였다고 말할수 있다. 봉건조정이 문호를 개방한후부터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외국자본의 사태속에서 항구가 건설되고 철도가 놓이고 공장들이 돌아가고 광산들이 개발되였으며 부두로동자, 광산로동자, 철도로동자, 토목건설로동자를 비롯한 산업로동자의 대렬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산업로동의 발생발전은 로동단체의 조직을 가져오게 하였다. 1890년대말에 벌써 리규순이라는 사람이 부두로동조합을 조직했는데 로동자조합으로서는 이것이 첫 산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초기의 로동단체들은 의형제나 부조계 형태로 조직되였으나 그것은 점차 로동계나 조합 형태로 발전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조작된후에는 진남포로동조합, 평양 신창리로동조합, 군산의 공동로동조합을 비롯한 근대적로동조합들이 전국각지에서 결성되였다.

물론 당시의 로동조합들은 거의다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공장별 조합들이였지만 그러한 로조단체들이 발생되자 곧 계급의 리익을 위한 로동자들의 집단적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한것만은 틀림없다. 1910년대에 들어와서는 로동쟁의가 전국각지에서 일어났다. 1920년대에 들어와 전국적인 합법적로동단체로서 로동공제회, 로동대회, 로동련맹회 등이 조직되면서부터 로동자들의 투쟁은 단순한 로동조건개선을 위한 쟁의가 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애국적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대중적로동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로동쟁의를 일으키는 로동자들을 검거투옥하고 로동단체를 해체시켰으며 집회를 엄금시켰다. 그로 인하여 우리 나라의 로동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1930년 9월 국제적색로동조합 집행국은 세칭 《9월테제》로 알려져있는 《조선의 혁명적로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라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로동조합을 산업별로 조직하며 거기에 공장위원회나 로동자상담실 같은것을 만들어 조합이 공고한 하부조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것을 강조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범태평양로동조합 비서부가 또한 조선로동운동의 실태를 분석하고 비합법적적색로조를 조직할데 대한 당면임무를 규정하였다.

국제공산주의로조운동의 성원을 받으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1931년부터 평양, 흥남, 원산, 청진, 서울, 부산, 신의주 등 산업도시들에서 적색로조를 조직하기 위한 투쟁이 치렬하게 전개되였다. 그 적색로조들은 로동자대중속에 맑스주의를 보급하고 그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으나 종파주의자들의 책동과 적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성황기를 보지 못한채 인차 자기 존재를 끝마칠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였다. 우리가 9월호소문을 가지고 신흥지구로 진출할 당시에는 로조지도자들이 거의다 투옥되거나 변절했거나 아니면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는 형편이였으므로 사실상 로조는 유명무실하였다.

파란많은 우리 나라 로동운동력사가 주는 심각한 교훈도 역시 혁명군중을 옳게 지도하지 못한데 있었다.

우리는 력사의 거울에 종래의 로동운동을 랭철하게 비쳐보면서 우선 로동계급속으로 들어가 로조를 빨리 재건하고 로동자대중의 힘과 지혜에 의거하여야만 전민항쟁준비를 옳게 진척시킬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9월호소문의 발표는 극도로 침체되였던 우리 나라 로조, 농조 운동을 중일전쟁이 발발한 정황에 맞게 다시 부활시키고 로선상 전환을 일으키는데서 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나는 장해우와 함께 청산령을 오르면서 줄곧 로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조선각지와 중국, 쏘련연해주 일대를 방황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해우는 지난 시기 함흥, 흥남 지구에서 활동하던 태평양로조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알고있는것이 많았다. 그는 국제적색로동조합산하의 태평양로조 울라지보스또크 조선지부 책임자가 김호반이라는 사람이였으며 그의 지도밑에 1931년 2월에 처음으로 함흥로동자련맹을 적색화한 함흥위원회가 조직되였다고 하였다.

나는 장해우에게서 함흥지구 적색로조 간부들의 이름을 적지 않게 알게 되였는데 그 로조간부들속에는 바바 마사오라고 하는 일본인로동자도 있었다. 장해우의 말에 의하면 김호반은 태평양로조 울라지보스또크지부에서 보낸 로조자금 1,200원을 가지고 자기 부인과 함께 함흥, 평양, 서울 등지를 다니며 활동하다가 1931년 여름 경찰에 체포되였다고 한다. 태평양로조산하 함흥지구 일본인로조 성원들까지도 1932년인가 1933년에 모두 체포되였다.

함흥, 흥남 지구의 로조운동에 생긴 공백을 메꾸고 이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우리는 이미 박금준, 김석연 등 지하공작에 경험이 있는 정치공작원들을 이 일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이 지구의 로동운동을 뿌리채 뽑아던지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마수를 피할수는 없었다. 박금준을 비롯한 여러명의 로조지도자들은 많은 일거리들을 남겨두고 감옥과 류치장으로 끌려갔다.

이런 실정을 고려하여 우리는 1937년 봄부터 흥남지구에 서간도에서 길러낸 정치공작원들을 여러명 파견하였다.

우리 일행이 청산령마루에 올라섰을 때 신흥지구비밀근거지에서 활동하던 소부대책임자인 한초남이 불쑥 우리를 찾아왔다.

밀영에 대기하고있으라고 했는데 왜 왔느냐고 물으니 그는 부전에 노구찌의 별장이 있고 적들의 경계도 다른 때보다 심하기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달려왔다고 하였다. 그가 오자 우리는 장해우를 신파로 돌려보냈다. 그다음부터 길안내는 한초남이 하였다.

얼마후 우리앞에는 넓고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한초남은 그것이 부전호 2호언제인데 이제 왼쪽기슭으로 올라가면 1호언제가 보인다고 하였다. 그 언제가까이에 경찰관주재소가 있고 거기서 3∼4리쯤 더 올라가면 노구찌의 별장이 있다는것이였다.

일본의 신흥재벌인 노구찌는 조선에서 군수공업을 창설하고 전기, 화학공업을 완전히 독점하기 위하여 수력발전소도 건설하고 흥남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전개하고 군수공업회사도 세웠다. 그리고 부전과 허천에 건설하는 수력발전소를 감독하기 좋은 위치에 별장을 지어놓았다.

비화로 가득찬 부전호의 건설력사를 더듬어보아도 노구찌가 우리 조선사람들을 어떻게 잔인하게 착취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1925년에 노구찌는 부전고원을 돌아보고 사이또총독에게 여기에는 수력자원도 많고 산림자원도 많고 게다가 눅은 로동력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사이또총독은 그 편지를 받고 눅은 로동력을 얼마든지 사서 수전공사를 시작하라, 대일본제국헌법이 그것을 보장할것이므로 안심하고 하는것이 좋겠다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부전호언제공사는 1920년대중기부터 시작되였는데 물길공사를 할 때 안전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은탓에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로동자가 무려 3,0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언제공사를 마감지을 때에는 물을 빨리 채우려고 호수주변에 있는 농민가옥들을 이주시키지도 않고 수문을 막아버려 600여세대나 되는 농민들이 인공수재를 입어 한지에 나앉는 참상이 벌어졌다는것이다. 그리고 통수식날에는 제물로 처녀를 바쳐야 수신의 보호를 받을수 있다고 하면서 나어린 조선처녀를 물속에 집어넣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고 한다.

노구찌는 늘 조선인로동자들을 우마로 생각하라고 지껄여댔다. 그가 언제공사를 할 때 얼마나 악독하게 놀았는지 일본사람들마저 《노구찌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를 비난하였다.

노구찌별장주변경계가 엄하였으므로 우리는 별장을 에돌아 며칠만에 기본목적지인 신흥의 동오골밀영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우리는 일제의 눈을 피해 산중생활을 하고있는 20명 가까운 청년들을 만나게 되였는데 그들이 산으로 피신해온 경위는 각각이였다.

부전강발전소 공사장에서 악질감독을 돌로 까죽이고 산에 들어박혀있다는 청년도 있었고 공사에 쓰는 다이나마이트를 훔치다가 발각되여 도망친 청년들도 있었으며 함흥거리에서 흥남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일제를 타도하라!》, 《노구찌는 우리의 피를 짜서 비료를 만든다》라고 쓴 삐라를 얻어가지고 다니다가 경찰에게 단속당하게 되자 도망친 청년들도 있었다.

고원출신의 《최면장》이라는 키큰 청년은 자기를 《관제공산주의자》라고 하였다. 《면장》이라는것은 관직이 아니고 얼굴이 무우형으로 길었기때문에 동무들이 붙인 별명이고 《공산주의자》는 본인스스로가 단 별명이라는것이다. 서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집에서 학비를 대지 못해 중퇴하고 돌아온 그는 한동안 일정한 직업이 없이 고원거리에서 지냈다. 바로 그무렵에 근처의 한 공장에서 적색로조사건이 터졌다. 놈들은 관계자들뿐아니라 미심쩍은 대상들도 모두 검속하였는데 《최면장》도 거기에 걸려들었다. 심문이 시작되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거짓말을 한다고 고문이 가해졌다. 코안에 고추가루물까지 부어졌다.

그는 고문을 못이겨 로조운동을 했다고 허위자백을 하였다. 그때부터 고등계형사는 《최면장》에게 모르는것을 배워주어가면서 공산주의자를 하나 만들어내게 되였다.

형사가 《너는 왜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되였는가? 그 동기를 말하라. 그것도 너는 모른다고 할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착취와 억압을 없애고 로동자, 농민의 주권을 세운다고 하고있다. 그래 너는 이것을 위해 공산주의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디 말해보라!》 이렇게 심문하면 그는 《네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식으로 3개월간의 예심을 받는 과정에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였다. 1년간 징역을 살고 나오자 이제는 당당한 《공산주의자》가 되였다. 일제경찰은 그를 계속 미행하였다. 고원경찰서 고등계형사가 만들어낸 《공산주의자 최면장》은 진짜공산주의운동선을 찾기 위해 산발을 타고 북으로 가던중에 동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산중생활을 하고있는 청년이였다.

《공산주의자 최면장》은 나에게 여기 모인 청년들은 모두 일제놈들과 싸울 각오가 되여있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제일 많이 웃은 사람이 김평이였다. 김평은 맑스나 엥겔스도 이 말을 들으면 앙천대소할것이라고 하면서 맑스는 부르죠아지가 자기에게 리윤을 주는 상품뿐아니라 자기를 매장할 프로레타리아도 만들어낸다고 하였는데 이제 보니 일제경찰이 바로 자기를 매장할 공산주의자를 만들어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우리 동무들에게 보라, 우리가 조국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현실을 알수 있겠는가, 조국의 청년들은 모두 이렇게 일제와 싸울 각오들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 산을 헤매고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청년들에게 9월호소문을 주고 부전령비밀근거지에 있는 소부대성원들과 련계를 맺게 하였다.

부전령산줄기를 타고오면서 몇개의 밀영들도 돌아보고 지형도 살펴보니 그 지대야말로 앞으로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투쟁근거지로 될수 있는 명당자리였다.

그 산줄기는 백두산줄기와도 잇닿아있었다.

우리가 참솔이 무성한 동오골밀영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부전령산줄기를 끼고있는 동해안지구에서 30명 정도의 정치공작원, 혁명조직책임자, 로조, 농조의 핵심들이 와있었다.

김재수, 김정숙의 지도를 받으며 흥남지구의 지하조직을 개척한 위인찬이 김혁철의 안내를 받으며 동오골밀영에 나타났다. 그의 몸에서는 물고기비린내가 풍기였다. 웬 물고기냄새인가고 했더니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물고기장사로 가장하느라고 고등어를 한중태기 메고왔다는것이였다. 그 두사람은 어릴적부터 도천리에서 같이 자란 송아지동무였다. 그들은 소년시절에 사회주의나라 쏘련을 동경하던 나머지 연해주에 가보려고 김공수와 함께 부모들 모르게 모험려행을 단행한 일도 있었다. 그 세사람의 부모들과 일가친척들은 사상경향이 대단히 좋았다.

위인찬이 도천리 조국광복회 조직으로부터 공작임무를 받고 흥남지구에 침투한것은 1937년 6월경이였다. 그의 뒤를 이어 인차 김공수를 비롯한 여러 공작원들이 흥남지구로 증원되여갔다. 때를 같이하여 원산에는 허석선이 파견되였고 신흥탄광에는 리효준, 창성에는 강병선이 들어갔으며 청진에서는 박우현이 조국광복회 조직과 련계를 맺고 사업하기 시작하였다.

조국광복회 흥남지구위원회를 조직한것이 그해 8월이라고 하는데 벌써 많은 로동자들이 지회에 흡수되였고 조직의 운영도 활기있게 되여간다고 하였다. 지회책임자인 위인찬은 자기 어머니에게 로동자간이음식점을 차려놓게 하고 그곳을 련락소로 리용하면서 사업내용을 수시로 김정숙, 김재수에게 보고하였다. 그들이 흥남에 와서 첫 조직을 꾸리던 이야기는 매우 교훈적이였다.

도천리에서 온 공작원들이 처음으로 발을 붙인 본궁화학공장 건설로동자들속에는 14살짜리 소년도 있었다. 그 소년이 하는 일은 불에 달군 쇠못을 운반해다가 높은곳에서 일하는 리베트공에게 던져주는것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소년이 한순간에 시체로 변하는 참사가 생겼다. 그 애가 올려던진 불에 달군 쇠못이 공교롭게도 우에서 떨어지는 철편에 맞아 다시 밑으로 떨어졌는데 면바로 카바이드통에 내리꽂히였다. 그바람에 카바이드통이 폭발하여 소년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쓰러졌다. 로동자들이 모여왔을 때 그는 이미 절명하였다.

일본인감독은 소년의 시체를 병원에 날라가려고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치료를 받다가 죽은것으로 조작하게 되면 안전시설을 하지 않은데 대한 로동자들의 불만을 무마시킬수 있을뿐아니라 소년의 가족들에게 위자료를 안주어도 되기때문이였다. 공작원들이 감독의 속심을 폭로하자 로동자들은 분개하여 소요를 일으켰다. 감독놈들은 겁을 먹고 시체를 어쩌지 못하였다.

로동자들은 소년의 장례를 치르고 그의 부모들이 위자료를 받을수 있도록 공장측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흥남공작원들은 로동자들속에서 신망을 얻었으며 로동자들속에 첫 조직을 내올수 있었다. 그들은 《협조계》라는 합법적인 명칭을 띠고 조직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어떤 중년사나이가 불쑥 《협조계》에 나타나서 느닷없이 《나는 프로핀테른이요!》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프로핀테른이란 국제적색로동조합의 략칭이다. 그가 아마 한때 태평양로조에 관계하였던 모양이다. 스스로 격을 높여 자기를 프로핀테른이라고 소개한 그 사람은 《당신네한테 경고하는데 좀 자중하오. 중일전쟁으로 요즘 일본사람들이 사나와졌기때문에 그들하구 엇서지 말아야 하오. 위자료요 뭐요 하면서 중뿔나게 나서지 마오. 당신들때문에 요시찰인물인 내가 화를 입는단 말이요.》하는 충고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그후부터 흥남공작원들은 로조관계자들이 극좌로부터 극우로 넘어갔다고 인정하면서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서호지구의 로조속에 당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임무를 받고 파견된 김석연도 지난날의 로조관계자들중에는 일제의 탄압에 겁을 먹고 일본의 《백색로조》나 구라파의 로동조합주의자들처럼 타협의 길로 나가는자들이 많다고 푸념하였다.

장해우의 말을 들어보면 원래 흥남지구 적색로조가 조직초기에는 반일투쟁을 아주 잘하였다고 한다. 1930년초에만 하여도 흥남로동조합은 공장가까이에 비밀서류를 보관하는 지하실까지 꾸려놓고 활동을 본때있게 하였다. 조합성원들은 그 지하실에서 격문도 찍어냈다. 밤이면 거리에 나가 반일구호를 내붙이였다. 그날의 용감한 붉은 로조는 모두 어디로 갔겠는가?

나는 흥남동무들에게 태평양로조관계자를 그대로 내버려둔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한다면 로조관계자들이 로동조합주의적방향으로 나갈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우리는 우선 동해안지구의 도시, 농촌, 어촌, 광산, 탄광들에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더 많이 내오고 숨어있는 로조, 농조 관계자들을 다 찾아내여 적어도 몇해안으로 신흥, 흥남, 함흥, 원산 일대에 수만명의 항쟁력량을 가지고있어야 한다. 부전령산줄기를 중심으로 비밀유격근거지를 꾸리고 당면하게는 수백명씩 되는 몇개의 무장부대를 상시적으로 가지고있어야 한다. 로동자들속에는 돌격대를 내오고 농민들속에는 생산유격대를 조직하되 그 모든 조직이 보이지 않는 비밀조직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9월호소문이 지하수처럼 소리없이 군중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하여야 한다.

항일혁명초기에 우리에게는 사람수보다 총이 적었지만 지금은 반대로 총은 많은데 사람이 부족하다. 남는 총으로 국내에 있는 전체 청년들을 무장시켜 결정적인 시각에 전민항쟁에로 넘어갈수 있게 해야 한다.…

그때 내가 강조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상과 같다.

나는 담화를 마치고 다음날 경찰들의 감시가 덜 미치는 신흥탄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신흥탄광 대표로 온 리효준이 나를 안내하였다.

수백세대나 되는 불우한 탄부가족들은 낡고 찌그러진 바라크에 빼곡이 들어박혀 숨막히는 생활을 하고있었다. 그고장에서는 질병과 로동재해로 해마다 수십명의 생명이 무덤으로 갔다. 나는 이곳에 찾아온 조직원들과 로조핵심들을 삼밭산의 비밀장소에 모여놓고 9월호소문을 해설해주고 당면과업도 주었다.

그때 한 탄광조직원이 찾아와서 적색로조에서 간부로 있던 자기 사촌형이 변성명을 하고 숨어산다고 하였다. 알고보니 그 사촌형은 로조성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 때 신흥으로 온 사람이였다. 로조가 파업을 잘못 지도하다보니 숱한 사람들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어떤 사람들은 일제의 개가 되여 조직의 비밀을 팔아먹었다. 경찰이 로조지도자들을 잡아갈 때 사촌형이라는 사람은 겨우 몸을 빼여 탄광으로 왔는데 로조동무들 보기가 부끄러워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신흥탄광을 떠나기전에 그의 형을 만나보았다. 그는 혁명을 같이하자는 우리의 청을 받자 지하에서 나와 만신창이 된 로조를 수습하여 어떻게 하나 9월호소문의 요구를 관철해가겠다고 하였다. 그에게는 로조원명단이 그대로 간수되여있었다. 그 사람은 흥남지구의 로조관계자들을 거의다 알고있었다.

우리는 그와 흥남지구 조직원들과의 련계를 지어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풍산을 향해 떠났다. 불개미재밀영에서 하루밤 류숙한 다음 곧장 황수원언제공사장으로 가보았다.

풍토사나운 령북땅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언제공사를 하고있는 그곳 인부들의 참상은 고역과 질병에 시달리고있는 신흥탄부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풍산에서는 천도교출신의 우리 정치공작원인 《김빠이》가 고급양복에 개화장을 짚고 다니면서 우리 일행을 안내하였다.

우리는 황수원언제공사장을 거쳐 풍산군 소재지를 지나 어느 화전마을의 외진 포수집에서 박인진을 만났다. 나는 오늘도 화로불에 햇감자를 구워먹으며 그와 함께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화전마을의 그 밤을 잊을수 없다.

그날밤 박인진은 최린을 천하제일매국노라고 규탄하였다.

그가 제일 미워한것은 《3대애국자》라고 자칭하는 최린, 최남선, 리광수였다. 박도정이 그들을 특별히 미워하는 까닭은 세사람이 조선민족을 미개민족처럼 근거없이 멸시한데 있다고 하였다.

《제 민족을 못난 민족으로 보는 사람치고 길을 옳게 걷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박인진의 말이 옳았다. 혁명이란 신념을 가지고 하는것인데 그 신념이란 정치적리념에 대한 믿음이기전에 자기 인민에 대한 믿음과 긍지인것이다. 자기 민족, 자기 인민에 대한 믿음과 긍지가 없다면 과연 어디서 애국심이 나올수 있겠는가.

나는 그날 박인진과 작별하고 캄캄한 밤길을 걸으면서 내내 그 생각을 하였다. 풍산지구 정치공작원들을 만나 9월호소문사상을 해설하면서도 박인진의 말을 인용하였다. 우리는 우리 인민, 우리 로동계급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민항쟁을 준비하는 길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력설하였다.

조국의 산과 들에 가을빛이 짙어가던 그때 조국광복의 대강을 안고 멀고 험한 길을 소문없이 걸어간 우리의 조국편답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가 신흥, 풍산 지구를 돌고난뒤에 부전, 함흥, 흥남, 원산, 단천, 풍산, 신흥을 비롯한 국내각지에서는 전민항쟁세력이 급속히 장성하게 되였다.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로동자돌격대가 무어진데 뒤이어 후치령생산유격대가 조직되였다는 소식이 연방 날아들었다. 공장들에서는 련이어 파업이 일어나고 공사장들에서는 인부들의 집단탈주사건이 벌어졌다.

함흥-신흥지구의 여러 공장, 탄광들에서도 로동자돌격대가 조직되여 곳곳에서 태업과 오작시공, 폭발사고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함흥만세교 란간과 동흥산의 구천각에 9월호소문과 관련한 선전문이 나붙은것도 그무렵이고 김일성이 함흥거리에 나와 리발을 하고갔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것도 그때였다. 김일성이 일본륙군병원에 입원했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함흥, 흥남 지구 공작원들은 9월호소문을 접수한 다음 로조와의 사업에서도 혁신을 가져왔다. 그들은 숨어있는 로조관계자들을 100여명이나 찾아내여 그들모두를 조국광복회 조직에 흡수하였다. 흥남지구 로조는 로동자돌격대의 원천지로 되였다.

《혜산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흥남지구 조직원들은 더 많은 일을 하였을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위인찬, 김공수, 김응정 동무들은 체포되여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원산, 문천, 천내리 지구에서도 우리 조직의 활동은 아주 왕성하였다. 천내리세멘트공장 조직원들은 9월호소문이 발표된 그해 가을에 1,000여명의 로동자들을 망라한 파업투쟁을 조직하여 적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전에 부수상을 한 정일룡이 문천제련소출신이였는데 그는 해방전에 자기네 문천제련소에 지하조직원들이 많았다고 자랑하였다. 자기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 왜놈십장들과 투쟁을 많이 하였으나 당시까지는 뒤에서 자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지하조직원들인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내가 해방후 평양에서 개선연설을 한 바로 그날에 문천제련소에서는 첫 쇠물을 뽑았다. 그것도 그 제련소에서 지하활동을 해오던 조국광복회 조직원들이 발기한 애국적소행이였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과 조직원들은 감방속에서도 9월호소문을 선전하며 투쟁을 계속하였다.

우리가 발표한 9월호소문이 미친 영향은 참으로 컸으며 그것은 국내의 혁명운동을 백두산과 련결시키는데서 결정적인 작용을 놀았다.

수풍발전소 로동자출신으로서 건설상을 한 최재하도 생전에 말하기를 1930년대말부터는 중부조선이북의 큰 공장, 건설장의 로동자들은 거의다 백두산과 련결된 조직의 영향밑에서 움직인것 같다고 하였다. 그도 동무들을 따라서 파업과 태업 운동에 여러번 참가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당시 우리 나라 산업지대들에는 어디에나 다 조국광복회 조직이 뿌리를 박고있었고 그 조직들의 영향밑에서 로동계급의 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이것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민에 대한 폭압과 략탈에 혈안이 되여 날뛰는 일제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다.

반일구국의 초지를 버리고 일제에게 전향한자들이 아무리 입을 모아 반공과 친일을 선전하여도 우리 로동계급은 동요없이 애국의 지조를 지켜 싸웠다.

9월호소문을 발표한 때로부터 5~6년이 지난 어느날 신문지상에 조선청년학생들에게 학도병진출을 권고하는 조만식의 권고문이 실린적이 있었다. 그것이 진짜 조만식이 쓴 글인지 아니면 일제가 조작한 글인지 그 내막은 알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 글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조만식이까지 전향하면 천하의 민족운동지도자들중 전향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아마 사람들은 그때 이런 생각을 한것 같다.

하지만 로동계급은 동요하지 않고 우리가 내놓은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나갔다. 특수무기를 연구하는 흥남지구의 어느 비밀군수공장에서는 세상을 법석 끓게 한 굉장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적들이 조사한데 의하면 사고의 원인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의식적인 파괴공작이였다. 우리 혁명조직성원들은 개미 한마리도 얼씬 못한다는 그런 소굴에까지 침투해들어가서 적들에게 타격을 가하는 투쟁을 조직하였다. 우리의 로동계급은 9월호소문을 적극 실천하였다.

9월호소문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고있던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중일전쟁으로 하여 변화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근로대중속에 깊이 침투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조직하고 궐기시킴으로써 조국광복의 대업을 더욱 성과적으로 이룩해나갈수 있게 하는 위력한 무기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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