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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24-8. 개선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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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6-09-05 23:46 조회 13,049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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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개선


주체34(1945)년 8월의 조선은 해방의 열파로 진동하였다.


삼천리를 뒤흔드는 감격의 열풍속에서 인민은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을 일일천추로 고대하고있었다.


민족의 령수를 낳은 고도 평양은 김일성장군님의 입성을 기다리느라고 밤에도 잠들줄 몰랐다. 주체14(1925)년에 설한풍을 헤치며 고향을 떠나신 김일성장군. 래일이면 오실가, 모레면 오실가. 그이를 기다리는 40만 평양시민의 간절한 마음 한결같았다.


서울에서는 려운형, 허헌, 홍명희를 비롯한 명망높은 인사들이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서울역전은 김일성장군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떨쳐나온 수천수만명의 시민들로 하여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3천만의 심장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실 그 순간을 향해 숨가쁘게 고동치고있었다.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했다는 소식이 훈련기지에 날아온 그 순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모두 흥분된 기분으로 조국에 돌아갈 차비를 하였습니다. 스무해동안이나 타향의 이슬비를 맞으며 살아온 나도 고향으로 한시바삐 돌아가고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귀국의 날도 얼마간 미루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개선을 학수고대하는 국내인민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우리도 모르는바가 아니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출발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조국에 돌아가더라도 준비를 더 잘해가지고 가자는것이 우리의 욕심이였습니다. 무슨 준비였는가. 새 조국 건설과 관련된 준비였습니다. 조국해방의 전략적과제가 완수된 조건에서 우리는 새 조국 건설과 관련된 시간표를 앞당기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1945년 9월 2일 도꾜만에 정박하고있던 미군전함 《미쑤리》호 함상에서는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국제적인 의식이 거행되였습니다. 그날 일본정부와 군부를 대표하여 외상 시게미쯔와 참모총장 우메즈가 항복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시게미쯔는 중국주재 일본공사로 있을 때 윤봉길렬사의 폭탄공격을 받고 외다리쟁이가 된 사람입니다. 우메즈도 일본군부의 명물이였습니다. 그는 1939년 가을부터 1944년 여름까지 관동군사령관을 하였습니다. 일본관동군이 존재한 전기간에 사령관을 여라문사람이 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두번째 사령관이였습니다. 적들이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내걸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대《토벌》소동을 벌린것이 바로 우메즈가 관동군사령관을 할 때입니다.


여러해동안이나 인류를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반파쑈력량의 승리로 종결되였습니다.


우리의 숙적이였던 바로 그 우메즈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패전의 슬픈 고배를 마실 때 우리는 항일혁명에서 승리하고 민족해방혁명의 새 력사를 창조한 주인공들이 되여 조국에 돌아올 차비를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공산주의사상의 발원지인 구라파와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최전방이였던 아세아의 여러 나라들이 민주주의적인 기초우에서 새 사회를 건설할수 있는 전망을 열어놓았습니다.


국내의 형편도 좋았습니다.


조국이 해방되기 바쁘게 우리 나라 각지에서는 인민위원회들이 조직되였습니다. 국내당조직에 망라되였던 혁명가들과 항쟁조직성원들이 핵심이 되여 도처에서 당단체와 군중단체 조직들도 내왔습니다. 평양과 서울을 비롯한 국내의 주요도시들에는 해내외의 문예인들이 민족문화건설의 새로운 꿈을 안고 집결하였습니다. 로동자들은 무장자위대를 조직하고 공장, 기업소들과 탄광, 광산, 항만, 철도 등을 스스로 보위하였습니다. 전민항쟁을 통하여 발양되였던 우리 인민의 구국열은 해방과 함께 건국열로 전환되였습니다.


조선혁명의 당면과업의 견지에서 보나, 종국적인 목적달성의 견지에서 보나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정세는 매우 락관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패망하였지만 반혁명은 혁명에 대한 공세를 단념하지 않고있었습니다. 일본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후에도 일본군패잔병들은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과 착취계급의 대표자들은 지하에서 새 조국 건설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준비하고있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들과 불순이색분자들, 정치적야심가들이 정체를 숨기고 당단체들과 인민정권기관들에 기여들었습니다.


우리는 원동에 있을 때 미군이 38선이남에 진주한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미국군대의 진주가 실현되면 우리 나라에는 두 대국의 군대가 동시에 진주하는것으로 됩니다. 전패국도 아닌 우리 나라 땅에 다른 나라 군대가 둘씩이나 와서 주둔하는것은 그 구실이나 명분여하에 관계없이 재미없는 일이였습니다.


갑오농민전쟁때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우리 나라에 군대를 출병시킨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은 그들의 덕을 조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량군의 출병은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 나라 강산은 전란에 부대껴 황페화되였습니다.


쏘미 량군의 주둔으로 하여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장으로 될수 있었으며 그 배경밑에서 우리의 민족력량은 좌익과 우익으로, 애국과 매국으로 분렬될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있었습니다. 당쟁이 성행하고 당파와 외세가 결탁하면 그 종착점은 망국으로 되는 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새 조국 건설을 다그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먼저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야 했습니다.


우리 혁명의 주체란 우리 인민자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항일혁명의 직접적담당자인 인민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에 참가한 수십수백만에 달하는 항쟁대오는 즉흥적으로 전장에 뛰쳐나온 자연군중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러해를 두고 가꾸어온 조직군중의 대오였습니다.


우리는 한사람을 혁명동지로 만들기 위해 100리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몸이 그대로 육탄이 되여 불속에도 뛰여들어갔습니다.


항일혁명의 전로정은 인민대중을 력사의 주체로 보고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광복성전의 1선에 내세워준 사랑과 믿음의 력사이며 인민대중자신이 자기의 피와 땀으로써 당당한 력사의 주체임을 과시해온 위대한 투쟁과 창조의 력사입니다. 이 인민과 인민혁명군의 투사들이야말로 새 조국 건설을 담당하게 될 우리 혁명의 주체였습니다. 인민의 사랑과 지지속에서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여 투쟁할 때 그 어떤 준엄한 시련도 이겨낼수 있으며 그 어떤 어려운 투쟁속에서도 승리할수 있다는것은 우리가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찾아낸 귀중한 진리입니다.


나라가 해방되자 적지않은 사람들은 조국을 찾는 일이 어렵지 일단 찾은 다음에 새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건국이야말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항일혁명을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해낸것처럼 우리는 새 조국 건설도 조선사람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하였습니다. 건당, 건국, 건군은 물론, 민족경제와 민족교육,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를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개척해나가자는것이 바로 우리의 결심이였습니다. 인민을 새 조국 건설에 불러일으키자면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할수 있는 혁명의 참모부가 있어야 하고 정권이 있어야 하고 새 사회 건설을 무력으로 담보할수 있는 군대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나는 이런 견해에 기초하여 1945년 8월 20일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과업으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3대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도 토의하고 필요한 조직사업도 하였습니다.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제 수행을 위한 소조들도 조직하고 파견지도 확정하였습니다. 강건, 박락권, 최광, 임철, 김만익, 공정수 등은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국으로 떠나기전에 소조성원들을 위한 강습을 여러날에 걸쳐 조직하였습니다. 강습에서는 파견지에 가서 수행해야 할 사업내용과 사업방법으로부터 각 지방 풍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들을 취급하였습니다. 강의는 나와 김책, 안길 등이 담당하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강습이 끝나자 조국으로 빨리 떠나자고 졸랐습니다. 그때는 누구나 다 조국에 돌아갈 날을 그리며 동심과 같은 심경에 잠겨있었습니다.


우리는 귀국할 때 아이가 달린 녀대원들은 후에 귀국시키기로 하고 훈련기지에 떨궈두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쏘련군대와의 련합작전계획에 따라 부대별로 제가끔 지정된 계선을 차지하고 전투행동에 진입하다가 불시에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했기때문입니다.


국내각지에 락하산으로 출전하기 위하여 훈련기지에서 대기하고있던 부대는 하바롭스크, 목단강, 왕청, 도문을 거쳐 륙로로 조국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정으로 하여 도중에 그 계획을 포기하고 로정을 변경시켜 배를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때 관동군패잔병들은 목단강 남쪽에 있는 차굴을 폭파하였습니다. 적들이 우회도로와 잇닿은 교량들과 목단강비행장의 활주로까지 파괴해놓았기때문에 우리는 자동차도 기차도 비행기도 다 리용할수 없는 형편이였습니다. 그래서 목단강까지 갔다가 원동으로 되돌아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군함을 타고 귀국의 길에 올랐습니다.


쏘련 제1원동전선군사령부의 한 대좌가 나를 호위하여 동행하였습니다.


함장은 나를 보고 중속으로 달려도 하루밤 하루낮정도면 원산항에 배를 댈수 있다고 장담하였습니다.


우리가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난 날은 파도가 심했습니다. 배의 량켠에 집채같은 파도가 솟아올라 갑판을 후려갈기군하였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장관이였습니다.


대부분이 바다에서 배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이여서 멀미때문에 단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배에서 하루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에는 바다가 잔잔했습니다.


배전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볼 때 이상스럽게 가슴이 뛰던 일을 좀처럼 잊을수 없습니다. 내 눈앞에는 어째서인지 열네살때 건느던 압록강이 떠올랐습니다. 망국의 한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그 압록강과 조국의 일만강들이 해방열에 모조리 녹아 이 바다를 펼쳐놓은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혈육들과 친지들, 동지들을 이국의 고혼으로 남겨두고 스무해만에 조국으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참으로 말이나 글로써는 다 설명할수 없는 일희일비의 심정이였습니다.


우리가 원산항에 상륙한것은 1945년 9월 19일이였습니다.


그때 부두에서 우리를 마중해준것은 원산시에 주둔하고있던 쏘련군사령부 성원들이였습니다.


그날 부두에 나온 조선사람들가운데서 기억나는 인물은 그 당시 쏘련군대에서 군관으로 복무하고있던 한일무입니다. 그가 강원도당위원장을 한것은 그후의 일입니다.


쏘련군측이 우리의 움직임을 비밀에 붙였기때문에 부두에는 환영군중이 나와있지 않았습니다.


후날 허헌, 홍명희, 려운형을 비롯하여 우리의 개선을 전렬에서 기다리고있던 국내의 명망높은 인사들은 우리가 원산항에 상륙했을 때 부두에 환영군중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미리 선통이라도 할것이지 행차를 그런 식으로 슬그머니 하면 백성들 체면이 어떻게 되는가고 하면서 섭섭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원산시당의 리주하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허헌의 말이 우리 귀국일정이 사전에 공개되였더라면 서울역에 나와서 매일같이 우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물론, 서울시민의 과반수가 도보와 기차로 원산땅에 쓸어들었을것이라는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야단스러운 환영을 조금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투사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수천수만날 전장과 교수대에서 바친 피와 로고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조국땅에 들어서자마자 조선인민혁명군이 개선했다는 소문을 내지 않고 인민들속에 조용히 들어가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기초작업이나 해놓고 조국의 인민들에게 인사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원산에 도착한후 지방당일군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민들속으로 빨리 들어가야 하겠다는것을 다시한번 통감하였습니다.


나는 원산에 상륙한 날 적지 않은 사람들과 담화를 하였습니다. 원산시당에 가서 당일군들과도 담화하고 동양려관에서 로동조합대표를 비롯한 지방유지들과도 담화하였습니다. 그중 많은 품을 들인것은 리주하와의 담화였습니다.


원산사람들과 담화를 하고나서 내가 받은 총적인 인상은 국내의 어느 당파나 어느 조직도 인민들에게 똑똑한 건국로선을 제시하지 못하고있다는것이였습니다.


원산시당의 어떤 일군들은 쏘베트를 꿈꾸고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진로에 대한 문제가 화제로 되자 사회주의혁명을 당장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원산시당청사 벽에 걸려있는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로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는 구호에도 그대로 반영되여있었습니다.


나는 그 구호를 보고나서 시당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로동계급의 힘만으로 새 조국 건설을 하려 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야 공산혁명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인데 로동계급밖에 믿을것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1920년대 후기 우리가 종종 만나보군하던 초기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대동소이한것이였습니다. 스무해가 지나 해방된 조국땅에서 그런 목소리를 다시금 듣게 되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견이나 주의주장에서는 특별한 진보도 없었고 새로운 시국의 흐름에 발을 맞추려는 진지한 모대김도 별로 없었습니다.


나는 원산시당일군들에게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로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고 한 시당청사의 구호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안고있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것만큼 민주주의기발아래 단결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조국땅에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로동계급뿐아니라 그 동맹자인 농민은 물론, 새 사회 건설에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군중을 통일전선에 묶어세워 거족적인 힘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원산시당사람들과의 담화는 저녁식사전에도 하고 후에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꾸 말을 시키는 바람에 나는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날수 없었습니다.


나를 수행해서 서철이와 함께 시당에 따라갔던 김익현은 나에게 다가와서 자정이 다됐다면서 산에서도 노상 밤을 밝혔는데 해방된 조국에 와서까지 밤을 패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나는 김익현에게 나라는 해방됐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출발진지에 서있다는것을 명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원산시당일군들과의 담화는 귀국후 내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의 정신에 기초하여 국내인사들에게 건국로선의 륜곽을 그려보인 조국에서의 첫 대화였습니다. 나는 그날 우리 나라에 세워질 정권형태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는 주장도 공개하였습니다.


리주하를 비롯한 원산시당일군들, 원산의 유지들을 만나보고나서 나는 우리가 8.15해방후 즉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내용으로 하는 새 조선 건설의 리정표를 작성하고 그것을 마련한 기초우에서 조국행을 한것과 조국에 발을 들여놓는 그길로 지정된 파견지로 떠나갈 결심을 한것이 천만번 정당하였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원산에 도착한 다음 지체하지 않고 함경남북도에 가서 사업할 소조들중에서 그 일부를 북행렬차에 태워 현지로 떠나보냈습니다. 같은 날 철원방면을 담당한 동무들도 남행렬차를 타고 파견지로 떠나갔습니다.


인간이 겪을수 있는 최악의 고초와 역경을 다 겪으며 혁명을 위해 청춘을 깡그리 바치면서도 한뉘 휴식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루의 휴식도 주지 않고 파견지로 떠나가라고 재촉하자니 사실은 나도 마음이 가볍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원산항에 상륙한 그날은 추석전날이였습니다. 원산에서 추석이나 쇠고 피곤이나 푼 다음 전우들을 파견지로 보내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절박한 국내형편을 보고는 그 미련마저도 털어버렸습니다. 원산을 떠난 함남북방향의 소조들은 렬차안에서 추석명절을 보냈습니다. 그 렬차는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가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파견원들속에는 김책도 있고 안길도 있고 최춘국, 류경수, 조정철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와의 작별을 몹시 서운하게 여기였습니다.


나도 역시 허전하였습니다. 항일전쟁때 중상을 당한 최춘국과 조정철이 어깨를 겯고 다리를 절름거리며 렬차승강대에 올라 나를 향해 손을 저어줄 때는 마음이 순편치 않았습니다. 마취제주사도 놓지 못하고 강짜로 수술한 그 다리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전장과 가시덤불길을 누벼왔습니까.


최춘국과 조정철은 해방된 조국에서 몇해동안 전상자대접을 받으며 항일전장에서 쌓인 피곤을 풀어도 될 사람들이였습니다.


하건만 그들은 그 피곤을 풀 몇시간의 여유도 없이 웃으면서 북방의 파견지로 떠나갔습니다.


앞에는 부강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생소한 봉우리들과 고개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봉우리들과 고개들을 넘자면 피와 땀을 많이 바쳐야 했습니다. 항일대전도 전인미답이였지만 새 조국 건설도 초행길이였습니다. 그 길이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초행길이 아니고 헤아릴수 없는 난관과 시련을 앞에 둔 어려운 길이 아니라면 그처럼 서두르지는 않았을것입니다.


나는 떠나가는 김책에게 짬이 생기거들랑 고향에 꼭 찾아가보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최춘국과 류경수, 조정철, 리을설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함경남북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파견지에 갔다가 평양으로 소환되여올 때까지 그들은 모두 고향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높은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니고있었기때문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강선제강소로 갈 때 고향집에도 들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만경대갈림길에 대한 노래를 지어부르고있지만 사실 항일혁명투사들은 개선후 누구도 고향에 가보지 않고 건당, 건국, 건군을 위한 기초작업을 하였습니다.


사령관의 명령지시를 관철하기전에는 고향에 갈 권리도 없다는것이 바로 우리 투사들의 사고방식이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조국땅을 밟은 첫날부터 인민들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투사들은 백두산에서 매고온 신들메를 풀사이도 없이 새 전구로 속속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네가 차지할 파견지를 하나의 작전지역처럼 여기였습니다. 우리의 조국개선은 개선이라기보다 혁명의 새 장을 개척하기 위한 전략적이동과 같은것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1945년 9월 20일 나는 서해지구에서 사업하게 될 동무들과 함께 평양행 렬차를 타고 원산을 떠났습니다.


북조선주둔 쏘련군사령부 대표가 우리를 마중하느라고 평양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부래산역에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는 우리의 조국개선을 열렬히 축하한다고 하면서 나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9월 22일 오전에야 평양에 도착하였습니다.


훈련기지에 떨어졌던 녀대원들은 그해 11월말경에 함경북도 선봉쪽으로 해서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김정숙은 청진에 오자마자 전화로 나에게 도착보고를 하였습니다. 일행은 안길, 최춘국, 박영순을 비롯한 청진파견조 성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위한 대중공작을 정열적으로 벌려나갔습니다.


청진에 머물고있던 김정숙은 청진제철소와 고무산세멘트공장, 부령야금공장을 비롯한 많은 공장, 기업소들과 교육, 문화 기관들도 살펴보고 각계각층 군중들과의 정치사업도 하였습니다. 그가 만나본 사람들가운데는 로동자, 농민, 사무원, 가정부인들과 당, 정권기관, 근로단체 책임일군들뿐아니라 나어린 중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청진시민들이 그때 김정숙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고 합니다. 《새길신문》은 1면에 《김녀사의 반생》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혁명활동을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북방의 도시들에서 겪은 체험이 얼마나 풍부했던지 그는 평양에 돌아와서도 얼마동안은 청진에 대한 말만 하였습니다. 그는 중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던 이야기와 자기네 일행을 위해 오찬을 마련한 라진면옥사람들의 후한 인심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린 김정일도 녀대원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도 평양에 입성한 다음날부터 전우들과 함께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내가 8.15해방후 제일 바쁘게 보낸 시기가 바로 그 시기입니다.


개선후의 사업에서도 기본은 사람과의 사업, 인민대중과의 사업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공장과 농촌, 가두에 내려가 인민들을 만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무실과 숙소에서 백두산시절처럼 전우들과 침식을 같이해가며 국내외에서 나를 찾아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국사를 의논하였습니다.


전우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고향에 가서 먼저 조부모님한테 인사라도 하고 오는것이 도리가 아닌가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설복을 해도 내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되자 림춘추는 나 모르게 슬그머니 만경대에 가서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린 나그네처럼 행세하면서 가족들의 안부를 다 알아가지고 왔습니다. 그 덕으로 나는 고향집소식을 상세하게 들을수 있었습니다.


9월말경부터는 무슨 경로를 타고 비밀이 새나갔는지 내가 평양에 와있다는 소문이 시내에 쫙 퍼졌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형록삼촌이 평남도당에 찾아와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림춘추는 형록삼촌에게 조카의 특징에 대해 아는것이 있으면 죄다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형록삼촌은 《우리 조카는 본명을 김성주라고 합니다. 만경대에서 어린시절을 보낼 때에는 증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웃을 때마다 볼우물이 패이군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날저녁 림춘추는 내가 거처하고있는 집으로 형록삼촌을 데리고왔습니다.


삼촌은 나를 만나자 《얼마나 고생했나!》 하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역의 하늘밑에 무주고혼이 되여 누워있는 혈육들 생각에 스무해동안 오는 바람 가는 바람을 다 맞으며 마음을 썩이던 지난날까지 되살아올라 목이 메이는 모양이였습니다. 삼촌으로서야 사실 기막힌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습니까.


《조카가 나라를 찾아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집을 지키느라고 형님과 형수님 령전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구만. 우리 가문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명이 짧을가.…》


삼촌은 이런 말을 하고나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그렇게 말쑥하던 얼굴이 왜 이렇게 거칠거칠해졌나, 백두산바람이 모질긴 모진 모양이야 하고 애달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얼굴이 거칠거칠해진것으로 말하면 나보다 형록삼촌이 더 심했습니다. 스무해전보다 곱절이나 더 늙어보이는 삼촌의 모습을 보니 사실은 나도 눈물이 났습니다. 무슨 주름살이 그리도 많던지, 저 무수한 주름살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인생고초가 어려있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두산이 지척이라면 신이라도 삼아 조카네 군대들 뒤시중을 할수 있었겠는데 스무해가 지나도록 이 삼촌은 아무 보탬도 주지 못했어.》


형록삼촌이 이런 말을 하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작은아버지야 집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날 나는 형록삼촌과 온밤 회포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야 삼촌을 만경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나를 만나보았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더니 삼촌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경대에 돌아가서는 할아버지에게 성주가 평양에 와있다고 가만히 귀띔해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그러면그렇겠지, 백두산이 변하면 변했지 우리 성주야 변할리가 있나. 지금 항간에서 〈전라도 김일성〉이요, 〈함경도 김일성〉이요 하는 말들이 돌아가는데 아무려면 조선땅에 무슨 김일성이 그렇게 많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나는 10월 9일 강선제강소를 돌아보고 그후 당을 창건한 다음 10월 14일에야 평양시환영군중대회에서 조국인민들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요란스러운 환영군중대회형식을 통해 인민들과 상봉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내인사들과 나의 전우들이 한사코 그런 큰 규모의 행사를 주장하고 고집하였습니다.


내가 한 모임에서 김영환이라는 가명대신 본명을 처음으로 공개하던 날 누구인가 연단에 나서서 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는 거족적인 민중대회를 가지자고 제의하였습니다. 모두들 그 제의에 열광적으로 호응해나섰습니다.


그때 벌써 뒤에서는 평안남도당과 평남도인민정치위원회의 공동주최로 나를 환영하기 위한 행사준비가 진척되고있었습니다. 행사전날에는 모란봉기슭의 공설운동장에 경축솔문과 가설무대까지 다 설치해놓았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김용범더러 요란스러운 행사놀음을 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안남도당사람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들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마다에 우리가 평양에 입성했다, 14일 공설운동장에서 조선인민과 상봉한다는 글발들을 내붙이였습니다.


1945년 10월 14일 정오가 가까와오는 때 행사장으로 내정된 평양공설운동장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거리에 나선 나는 광장과 대통로들에 차고넘치는 인파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회장은 벌써 사람바다를 이루고있었습니다. 운동장밖의 나무꼭대기들에도 사람들이 올라가있었고 최승대와 을밀대쪽에도 사람들이 하얗게 덮여있었습니다. 대회장안팎을 휩쓰는 그 환영의 열파를 타고 나는 군중이 환호를 올릴 때마다 손을 들어 그들에게 답례하였습니다.


그날의 군중대회에는 쏘련 제25집단군 사령관 치스쨔꼬브상장과 레베제브소장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날 여러 사람들이 연설을 하였습니다.


조만식이도 연탁에 나섰습니다. 그의 연설가운데서 청중을 웃기던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그는 아주 건드러진 목소리로 조선이 해방되였다기에 이게 생시인지 꿈인지 알수가 없어서 내팔을 이렇게, 이렇게 꼬집어보았더니 아팠소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팔을 꼬집는 시늉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연단에 나설 때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의 함성과 환호성은 고조에 달하였습니다.


그 환호성을 듣는 순간 나의 심신에서는 스무해동안 쌓이고쌓인 피곤이 한꺼번에 다 날아나버리였습니다. 민중의 환호성은 열풍이 되여 내몸과 마음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10여만 군중의 뜨거운 열기와 환호를 한몸에 받으며 단상에 서있을 때 나를 지배한것은 그 어떤 미사려구를 다 동원해도 그려낼수 없는 행복감이였습니다.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어느때였는가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순간이였다고 대답할것입니다. 민중의 아들로서 민중을 위해 싸웠다는 행복감, 민중이 나를 사랑하고 신임한다는것을 느끼는데서 오는 행복감, 그 민중의 품에 안긴 행복감이였을것입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폭발한 민중의 환호성은 조국과 겨레를 위해 우리가 겪어온 반생의 간난신고에 대한 표창이고 답례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는 그 답례를 나에 대한 인민의 사랑과 신뢰로 받아들이였습니다. 내가 늘 말하는것이지만 인민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것보다 더 큰 락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민의 사랑, 인민의 지지,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혁명가의 존재가치와 혁명가가 향유할수 있는 행복을 측정하는 절대적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인민의 사랑과 지지를 떼놓으면 혁명가에게 남는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르죠아정객들은 돈으로 인민들을 유혹하지만 우리는 피와 땀을 바쳐 인민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나는 인민이 나에게 주는 이 신임앞에서 감격하였으며 그것을 내가 누릴수 있는 일생일대의 락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날 내가 한 연설의 골자는 민족대단결이였습니다. 나는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애국성업에 이바지하자고, 온 민족이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이 땅우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나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군중은 하늘땅을 진감하는 박수와 환호로써 지지를 표시하였습니다.


 


당시의 신문 《평양민보》는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 펼쳐졌던 정경을 《금수강산을 진동시키는 40만의 환호성》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평양의 력사가 깊어 4천년, 인구가 적지 않아 40만이라 하나니 일찌기 이와 같이도 많은 사람이 모인 일이 있었던가? 이와 같이도 뜻깊은 모임을 가져본 일이 있었던가?…


…특히 대회를 력사적으로 뜻깊게 하고 회중을 감동케 한것은 조선의 위대한 애국자, 평양이 낳은 영웅 김일성장군이 여기에 참석하여 민중에게 반갑고도 열렬한 인사와 격려를 보낸것이다. …조선동포가 가장 숭모하고 고대하던 영웅 김일성장군께서 그 름름한 용자를 한번 나타내이니 장내는 열광적환호로 숨막힐듯 되고 거의 전부가 너무 큰 감동때문에 소리없는 울음을 울었다. …군중에게 준 감동은 강철과 같은것이여서 산야가 떠나갈듯한 환호성가운데 〈이 사람과 같이 싸우고 같이 죽으리라〉는 사람들의 결의는 눈에 보일듯이 고조되였다.》


 


그날의 군중대회는 우리 인민이 새 조국 건설의 장도를 개척하는 행군의 첫시작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는 그날 대회장에서 현양신삼촌어머니와 강룡석외삼촌도 만나보았습니다.


행사가 끝난 다음 주석단에서 내려와 삼촌어머니를 만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군합니다.


한몸의 건사조차 힘든 그 인파속으로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지 삼촌어머니는 내가 타고온 승용차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고있었습니다. 주석단쪽을 향해 막무가내로 나오는 삼촌어머니를 주도일이 차에까지 안내하였다는것이였습니다.


삼촌어머니는 내 손을 부둥켜잡고 《조카, 이게 몇해만이요!》하면서 감격해하였습니다.


《삼촌어머니, 큰 가문의 살림살이를 혼자서 맡아안고 얼마나 고생이 막심했습니까!》


나도 삼촌어머니에게 짤막한 인사를 했습니다.


《고생이야 산에서 싸움을 하며 지낸 조카가 더했지, 춘하추동 뜨뜻한 구들에서야 무슨 고생이였겠소. 나는 이 운동장으로 오면서도 은근히 걱정했다우, 령감이 조카가 왔다고는 했지만 혹시 우리 조카가 아니고 〈전라도 김일성〉이면 어쩌나. 그런데 연단을 쳐다보니 틀림없는 우리 조카가 아니겠소. 얼마나 기쁘던지.…》


삼촌어머니는 이런 말을 하고나서 또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의 전우들도 다같이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삼촌어머니, 온 평양이 웃고 떠들고 춤을 추는데 이 기쁜날 왜 자꾸 울기만 하십니까.》


《조카를 보니 형님생각, 아주버님생각이 나서 그런다우. 이런 날 형님이랑 아주버님이랑 살아서 조카의 연설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들 하겠나.》


《삼촌어머니, 오늘은 삼촌어머니가 우리 어머니 대신입니다.》


그 말을 듣자 삼촌어머니는 내 가슴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나는 삼촌어머니의 눈물이 우리 어머니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삼촌어머니는 친자매간보다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삼촌어머니가 우리 가문에 시집을 온것이 15살때였다고 합니다. 시집살림살이가 하도 가난해서 삼촌어머니는 처음에 우리 가문에 정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부터 시집에 정을 붙이였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삼촌어머니를 몹시 사랑해주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삼촌어머니는 밭일을 해도 늘 같이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밭김을 매다가도 쉴참이 되면 늘 잠이 모자라서 고달파하는 삼촌어머니에게 무릎베개를 베여주고 잠간이나마 눈을 붙이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단잠에 든 삼촌어머니의 머리를 조용히 빗어주군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 시집살이를 시작한 삼촌어머니이니 우리 어머니를 잊을수 없었습니다. 삼촌어머니는 우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안도에 가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령전에 절을 드리지 못한데 대해 무척 애달파하였습니다.


삼촌어머니는 이 못난게 백이 된들 어찌 형님 한분을 대신할수 있겠소, 그렇지만 조카, 오늘은 형님도 혼이 되여 날아와 이 운동장에 계시는것 같구만이라고 하면서 저고리소매로 눈굽을 꾹꾹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울다가는 웃고 웃다가는 울고 하면서 형록삼촌과 대판 다투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우뭉스런 령감이 글쎄 나도 몰래 혼자서 성안에 들어와 조카를 가만히 만나고 돌아오지 않았겠소, 엽때 입을 가만히 봉하고있다가 어제야 토설합디다, 그래서 내 한바탕 야단을 쳤다우, 령감, 김일성이 뭐 령감 혼자의 조카고 내 조카는 아니란 말이요 하고 들이댔더니 뚱딴지같이 팔은 안쪽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지 않는다나 하면서 한바탕 왁작 떠들었습니다.


그날 오후에야 나는 삼촌내외와 함께 만경대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니는 길로 해서 가지 않고 순화강나루터에 승용차를 댄 다음 배를 타고 고향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감탕판에는 그전처럼 나루배를 탈 때 발을 옮겨디딜수 있게 징검돌들이 듬성듬성 박혀있었습니다. 내가 어린시절에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참게를 잡던곳이였습니다.


그날 고향마을로 들어설 때 나를 맞아주던 다듬이방치소리와 만경봉의 다박솔향기를 나는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그 다듬이방치소리가 왜 그리도 구성지고 그 다박솔향기가 왜 그리도 싱그럽던지 모르겠습니다. 갈매지벌쪽에서 소가 길게 영각을 울릴 때면 오래간만에 맛보게 되는 고향의 향취에 그만 목이 꺽 메이는것 같았습니다.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생각에 쪽잠마저 어설프던 유년시절이 어제같은데 내 나이 어느덧 서른세살이 되였으니 옛 사람들이 어찌 세월의 무정한 흐름을 일촌광음에 비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망국 40년만에 조국을 찾고 리향 20년만에 고향을 찾았다면 우리는 그 조국과 고향을 위해 너무도 많은 세월을 바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국은 순간이요 복국은 천년이라는것이 항일혁명 20년의 로정을 걸으면서 내가 얻은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였습니다. 잃기는 헐해도 찾기는 힘든것이 바로 조국이라는 뜻입니다. 순간에 잃은 조국을 찾느라고 수십년, 지어는 수백년의 고생을 해야 하는것이 이 세상의 준엄한 리치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200여년만에 독립했다는것은 잘 알려져있는 사실입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300여년, 알제리는 130여년, 스리랑카는 150여년, 윁남은 근 100년만에야 각각 나라의 독립을 성취할수 있었으니 망국의 대가란 실로 얼마나 비싼것입니까.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종종 젊은 사람들에게 조국을 잃으면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다,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거든 나라를 잘 지키라, 나라잃은 설음으로 통곡하기전에 조국을 더 부강하게 하고 막돌 한개라도 더 주어다가 성새를 높이 쌓으라고 말해주군합니다.


고향집을 찾던 그날의 풍경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짜개바지를 입은 두세살쯤 되는 사내애가 길가에서 우리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입니다. 그 별치않은 광경이 왜 그런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아담한 향촌, 그 평화로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아무 시름도 없이 태평스럽게 손을 저어주는 그 어린것의 모습은 분명 새 조선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삼촌어머니를 앞세우고 고향집뜨락에 들어설 때는 가슴이 막 설레이였습니다. 20년전만 해도 큰 광장처럼 넓어보이던 뜨락이 그때는 손바닥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무해에 걸치는 간고무쌍한 행군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니 일만장강을 건느다가 뭍에 오른 심정이였습니다.

눈에 익은 고향집추녀를 바라보는 순간 어린시절 자장가를 불러주고 입김으로 언 손을 녹여주던 아버지와 어머니, 봄날의 락화와도 같이 땅속에 묻힌 그 아버지, 어머니가 옛 모습 그대로 소생하여 《성주야!》하고 소리쳐 부르며 달려나와 두팔을 크게 벌리고 나를 부둥켜안는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혀 걸음을 선뜻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버선발바람으로 마당에 달려나온 할아버지는 나를 얼싸안고 《우리 장손이 돌아오는구나. …어디 보자! 어디…》 하고 눈물속에 뇌이였습니다. 할머니도 나를 만나자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쓴다더냐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였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평양에서 가지고온 술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 서른살이 넘도록 효도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라. 네 아버지가 하다가 못한 조선독립을 네가 해냈으면 그게 효도지 그보다 큰 효도가 어디 있겠느냐. 나라와 백성을 잘 돌보면 그게 효도니라.》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면서 가볍게 잔을 냈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웃음을 지으며 오늘은 술맛이 참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손만은 가볍게 떨고있었습니다. 그날은 할머니도 어렵지 않게 잔을 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송구스러운 심경에서 헤여날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너무도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생각이 잠시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잘 돌보는것이 효도라고 한 할아버지의 말을 생각할수록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남리사람들은 다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내가 귀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단리와 추자섬에서도 사람들이 떼를 지어 찾아왔습니다. 소꿉시절의 나의 동무들도 음식을 해가지고 줄레줄레 모여들었습니다.

소박한 가족연회가 수십명을 망라하는 군중연회로 번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여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주었습니다. 김응우증조할아버지대부터 우리 집 신세를 많이 지고 산 최로인도 《꿍니리타령》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삼촌어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지은 자장가를 불렀습니다.

그날밤 나는 20년만에 고향집에서 자게 되였습니다.

그때 우리 고향집은 구들을 뜯어놓고 문도 채 달지 못하고 지내는 형편이였습니다. 채 마르지 않은 구들에는 밀짚과 벼짚을 깔고 그우에 멍석을 펴고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집 사랑방에 잠자리를 정해놓았으니 오늘밤은 궁색한대로 거기 가서 자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우리는 산에서 호강을 하다가 온게 아닙니다, 풍찬로숙을 하다가 왔습니다, 하늘을 지붕삼고 초목을 이불삼아 덮고 살았습니다, 좋은 제 집에 와서야 왜 구차스럽게 남의 집에 가서 자겠습니까, 나는 우리 집에서 자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더니 희색이 만면해서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집 사랑방은 물리겠다, 하기야 스무해만에 찾아온 고향집인데 남의 집 사랑방신세를 진다는것도 멋적긴 멋적다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멍석우에 대를 두고 물려오는 무명이불을 펴주었습니다. 그 이불거죽은 우리 할머니가 무명낳이를 하여 만든것이였습니다.

깊은 밤중에 할머니는 내 베개밑으로 팔을 밀어넣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산에서 장가를 갔대지? 색시도 산에 있었나?》

《예, 나하고 같이 빨찌산투쟁을 한 녀자입니다.》

《아들애는 너를 닮았느냐?》

《닮았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됐다.》

할머니는 그밖에도 많은것을 물었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팔이 아파할것 같아 할머니, 내 머리가 무겁지 않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무겁기야 뭘 하면서 내 목밑으로 팔을 더 깊숙이 밀어넣었습니다. 서른이 넘은 손자를 위해 유년시절에 그래주었던것처럼 팔베개로 내 목을 고여주는 할머니의 사랑이 가슴을 후덥게 해주었습니다.

《해방이 됐으니 이제는 만주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도 옮겨야겠다.》

그것은 그날밤 할머니가 맨 마지막으로 꺼낸 화제였습니다. 할머니로서는 응당 관심을 가질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타향의 진토속에 묻힌 자식들의 유해를 고향에 옮겨다 묻고싶어하는 그 심정이야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할머니, 천묘도 천묘지만 나한테는 그보다 먼저 찾아야 할 은인들이 있습니다. 연포리주막집에서 아버지를 빼돌린 황씨와 가둑령의 전주 김씨로인, 촉한에 걸린 나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조씨로인을 찾아내고싶습니다. 그분들을 찾아낸 다음에야 천묘도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러면 양지촌의 아버지도 좋아할게다.》

나는 할머니에게 길림시절과 간도시절, 백두산시절에 나를 도와준 은인들과 전우들, 친지들에 대하여 밤새도록 말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이국의 산야와 타향의 이름모를 언덕받이에서 고혼이 되여 잠들고있는 아버지, 어머니와 형권삼촌, 철주동생에 대해서도 추억하며 소리없이 눈물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도 소리를 죽여가며 간간이 흐느끼였습니다.

할머니는 오열을 멈추고 내 팔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갔지만 그대신 정숙이가 가문에 들어오지 않았느냐. 그리구 정일이가 태여나서 집안의 대를 잇게 되지 않았니.》

나는 백두의 산상과 만주설원에서 겪어온 행적을 조용히 더듬어보며 나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얼굴도 그려보고 은인들도 생각하고 어린시절도 추억하고 우리가 건설하게 될 새 조국의 미래도 설계해보았습니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스무해만에 맛보게 되는 만경대의 밤, 그 밤은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였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광복된지도 만 두달, 그러나 3천만 조선민족은 그때까지도 해방의 열광속에 그냥 깊이 잠겨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3천만가운데 조국해방이 곧 국토분단과 민족분렬을 낳고 그 분단과 분렬이 근 반세기의 대국난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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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고향집을 찾던 그날의 풍경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짜개바지를 입은 두세살쯤 되는 사내애가 길가에서 우리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입니다. 그 별치않은 광경이 왜 그런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아담한 향촌, 그 평화로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아무 시름도 없이 태평스럽게 손을 저어주는 그 어린것의 모습은 분명 새 조선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삼촌어머니를 앞세우고 고향집뜨락에 들어설 때는 가슴이 막 설레이였습니다. 20년전만 해도 큰 광장처럼 넓어보이던 뜨락이 그때는 손바닥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무해에 걸치는 간고무쌍한 행군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니 일만장강을 건느다가 뭍에 오른 심정이였습니다.
눈에 익은 고향집추녀를 바라보는 순간 어린시절 자장가를 불러주고 입김으로 언 손을 녹여주던 아버지와 어머니, 봄날의 락화와도 같이 땅속에 묻힌 그 아버지, 어머니가 옛 모습 그대로 소생하여 《성주야!》하고 소리쳐 부르며 달려나와 두팔을 크게 벌리고 나를 부둥켜안는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혀 걸음을 선뜻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버선발바람으로 마당에 달려나온 할아버지는 나를 얼싸안고 《우리 장손이 돌아오는구나. …어디 보자! 어디…》 하고 눈물속에 뇌이였습니다. 할머니도 나를 만나자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쓴다더냐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였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평양에서 가지고온 술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 서른살이 넘도록 효도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라. 네 아버지가 하다가 못한 조선독립을 네가 해냈으면 그게 효도지 그보다 큰 효도가 어디 있겠느냐. 나라와 백성을 잘 돌보면 그게 효도니라.》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면서 가볍게 잔을 냈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웃음을 지으며 오늘은 술맛이 참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손만은 가볍게 떨고있었습니다. 그날은 할머니도 어렵지 않게 잔을 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송구스러운 심경에서 헤여날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너무도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생각이 잠시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잘 돌보는것이 효도라고 한 할아버지의 말을 생각할수록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남리사람들은 다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내가 귀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단리와 추자섬에서도 사람들이 떼를 지어 찾아왔습니다. 소꿉시절의 나의 동무들도 음식을 해가지고 줄레줄레 모여들었습니다.
소박한 가족연회가 수십명을 망라하는 군중연회로 번져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여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주었습니다. 김응우증조할아버지대부터 우리 집 신세를 많이 지고 산 최로인도 《꿍니리타령》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삼촌어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지은 자장가를 불렀습니다.
그날밤 나는 20년만에 고향집에서 자게 되였습니다.
그때 우리 고향집은 구들을 뜯어놓고 문도 채 달지 못하고 지내는 형편이였습니다. 채 마르지 않은 구들에는 밀짚과 벼짚을 깔고 그우에 멍석을 펴고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집 사랑방에 잠자리를 정해놓았으니 오늘밤은 궁색한대로 거기 가서 자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우리는 산에서 호강을 하다가 온게 아닙니다, 풍찬로숙을 하다가 왔습니다, 하늘을 지붕삼고 초목을 이불삼아 덮고 살았습니다, 좋은 제 집에 와서야 왜 구차스럽게 남의 집에 가서 자겠습니까, 나는 우리 집에서 자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더니 희색이 만면해서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집 사랑방은 물리겠다, 하기야 스무해만에 찾아온 고향집인데 남의 집 사랑방신세를 진다는것도 멋적긴 멋적다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멍석우에 대를 두고 물려오는 무명이불을 펴주었습니다. 그 이불거죽은 우리 할머니가 무명낳이를 하여 만든것이였습니다.
깊은 밤중에 할머니는 내 베개밑으로 팔을 밀어넣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산에서 장가를 갔대지? 색시도 산에 있었나?》
《예, 나하고 같이 빨찌산투쟁을 한 녀자입니다.》
《아들애는 너를 닮았느냐?》
《닮았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됐다.》
할머니는 그밖에도 많은것을 물었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팔이 아파할것 같아 할머니, 내 머리가 무겁지 않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무겁기야 뭘 하면서 내 목밑으로 팔을 더 깊숙이 밀어넣었습니다. 서른이 넘은 손자를 위해 유년시절에 그래주었던것처럼 팔베개로 내 목을 고여주는 할머니의 사랑이 가슴을 후덥게 해주었습니다.
《해방이 됐으니 이제는 만주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도 옮겨야겠다.》
그것은 그날밤 할머니가 맨 마지막으로 꺼낸 화제였습니다. 할머니로서는 응당 관심을 가질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타향의 진토속에 묻힌 자식들의 유해를 고향에 옮겨다 묻고싶어하는 그 심정이야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할머니, 천묘도 천묘지만 나한테는 그보다 먼저 찾아야 할 은인들이 있습니다. 연포리주막집에서 아버지를 빼돌린 황씨와 가둑령의 전주 김씨로인, 촉한에 걸린 나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조씨로인을 찾아내고싶습니다. 그분들을 찾아낸 다음에야 천묘도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러면 양지촌의 아버지도 좋아할게다.》
나는 할머니에게 길림시절과 간도시절, 백두산시절에 나를 도와준 은인들과 전우들, 친지들에 대하여 밤새도록 말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이국의 산야와 타향의 이름모를 언덕받이에서 고혼이 되여 잠들고있는 아버지, 어머니와 형권삼촌, 철주동생에 대해서도 추억하며 소리없이 눈물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도 소리를 죽여가며 간간이 흐느끼였습니다.
할머니는 오열을 멈추고 내 팔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갔지만 그대신 정숙이가 가문에 들어오지 않았느냐. 그리구 정일이가 태여나서 집안의 대를 잇게 되지 않았니.》
나는 백두의 산상과 만주설원에서 겪어온 행적을 조용히 더듬어보며 나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얼굴도 그려보고 은인들도 생각하고 어린시절도 추억하고 우리가 건설하게 될 새 조국의 미래도 설계해보았습니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스무해만에 맛보게 되는 만경대의 밤, 그 밤은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였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광복된지도 만 두달, 그러나 3천만 조선민족은 그때까지도 해방의 열광속에 그냥 깊이 잠겨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3천만가운데 조국해방이 곧 국토분단과 민족분렬을 낳고 그 분단과 분렬이 근 반세기의 대국난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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