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4-3. 대일작전의 돌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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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6-08-20 22:14 조회 7,636 댓글 0본문
3. 대일작전의 돌파구
대일작전전야에 조국해방의 기치,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의 기치를 들고 소부대정찰활동을 벌리다가 영웅적으로 희생된 조선인민혁명군 용사들은 수없이 많다.
소부대정찰활동에 참가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자기희생적인 투쟁으로써 대일작전의 돌파구를 열어나갔다.
아래에 수록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회상교시를 통하여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적구정찰활동에서 세운 영웅적위훈을 새겨보게 된다.
조국해방을 위한 대일최종작전을 준비하던 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은 선봉에 서서 그 돌파구를 열어나갔습니다.
대일작전수행과 그것을 준비하던 나날에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국제련합군에 망라되여있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직접적인 선을 통해서도 진행되였으며 국제련합군 별동대의 선을 통해서도 진행되였습니다.
대일작전을 예견하는 군사정찰활동, 특히 국제련합군의 공동정찰작전을 적극화하는것은 당시의 정세로 볼 때 매우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전략적기도를 제때에 알아내자면 일본본토는 말할것도 없고 쏘련과의 접경지역인 만주나 조선에서 군사정찰활동을 대대적으로 벌려야 했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둔 우리에게는 종전과는 대비조차 할수 없는 방대한 정찰과제가 제기되고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일제와의 마지막결전을 준비하고있었습니다. 그러자니 정찰대상이 많아질수밖에 없었습니다. 1∼2개 또는 3∼4개 대상에 대한 습격전, 파괴전, 매복전을 위주로 하던 지난날의 싸움에서는 승산이 있는 대상들만 골라 쳤기때문에 정찰대상도 거기에 국한되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적주둔지와 요새구역, 비행장, 포화력진지를 비롯한 모든 적대적요소들을 다 정찰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지어는 반동단체소재지와 그 구조적특성, 민심동향까지도 다 정찰대상이였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군사정찰활동을 중시하였던 다른 하나의 리유는 일본군대의 기동이 빈번해지고 지휘기구가 자주 교체된 사정과도 관련되여있었습니다.
독일이 쏘련을 침공하자 일본군부는 만주의 관동군을 수십만명이나 더 늘였습니다. 히틀러군대가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쏘련이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면 즉시로 북공을 개시하자는 심산이였습니다. 이런 야심을 가지고 만주에 군대를 대대적으로 이동시켰습니다.
히틀러군대가 모스크바를 먹지 못하고 우물거리기 시작하자 약삭바른 일본군부는 북공이 시기상조라는 판단을 내리고 《북수남공》에로 넘어가 진주만공격이다, 싱가포르함락이다 하면서 만주방면에 집중되였던 병력가운데서 많은 부분을 남방으로 빼돌리게 되였는데 그자리를 메꾸자고 하니 새로운 인원과 전투기재들을 이동시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만주와 국내의 넓은 판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조국해방작전에 필요한 정찰자료들을 수많이 수집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수집한 정찰자료가운데서 첫자리에 놓아야 할것이 조쏘, 조만, 쏘만 국경일대에 구축된 요새들과 요새구역에 대한 자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료들이 없었더라면 그처럼 훌륭하게 대일작전을 해내지 못했을것입니다. 우리가 사전에 적의 속내를 죄다 탐지했기때문에 《범의 아들》이라고 우쭐렁거리던 관동군의 정예무력이 변변히 저항도 못해보고 손을 들고말았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이 요새구역들을 난공불락이라고 자랑할만도 하였습니다. 세상사람들은 프랑스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지그프리트선이 굉장한줄만 알았지 일본의 요새들과 요새구역들이 얼마나 요란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고있는것 같습니다.
일본사람들이 구축한 요새구역들을 한데 련결시키면 총 연장길이가 1,000키로메터이상이나 됩니다. 일본은 오랜 기간 막대한 물자를 들이밀어 이 요새선을 구축해놓았는데 보통 1개 요새구역에 영구화점과 토목화점만 해도 평균 500개나 되는데다가 지휘소와 감시소, 화력진지, 각종 엄개와 전호, 교통호, 반땅크, 반보병 차단물들까지 셈에 넣으면 정말 개미 한마리도 얼씬할수 없을 지경이였습니다. 관동군의 기본주력이 이 구역들에 배비되여있은것만 보아도 일본군부가 이 요새구역들을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새구역정찰에 선차적인 힘을 넣었습니다.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만주와 국내로 들락날락할 때 동흥진요새구역의 북쪽익측을 통과한적이 있는데 가는곳마다에서 적의 화점들과 잘 위장된 엄개에 맞다들군하였습니다. 밤중에 숙영했다가 새벽 일찍 잠을 깨고보면 적들이 설치한 지하구조물의 지붕이 아니면 영구화점옆이였습니다.
한번은 적초소가 있는 산밑에서 숙영한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대원들을 조심조심 깨워가지고 적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갔습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동무들이 지난밤 어떤데서 잤는지 아는가, 적의 초소가 있는 산비탈밑에서 숙영했다고 하니 다들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요새구역정찰을 위해서는 몇개의 정찰조를 고정적으로 들이밀었습니다. 실례로 함경북도의 경흥(은덕)요새구역은 10여개의 정찰조가 전담하였습니다. 훈춘, 동흥진, 동녕 요새구역에도 그만 못지 않은 력량이 투입되였습니다.
우리 정찰병들은 그때 적의 요새구역에 뚫고들어가 영구화점의 콩크리트쪼각까지 떼가지고 왔습니다.
영구화점의 크기나 포의 구경 같은것은 노끈이나 자로 재면 되지만 적의 보초옆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콩크리트쪼각을 감쪽같이 떼온다는것은 사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무들은 이 어려운 과제도 훌륭히 해냈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국경일대에 구축된 요새구역뿐아니라 라진, 청진, 원산 일대와 멀리 조국남단에 있는 진해요새, 려수요새까지 정찰하였습니다.
정찰병들은 넓은 지역에 전개되여있는 요새들과 거기에 배치된 병력과 포무력, 비행장과 비행기의 대수까지 알아냈고 항구시설, 적함들의 종류와 톤수, 항구출입질서, 통신결속소위치, 군수물자창고를 비롯하여 알아낼것을 다 알아냈습니다.
요새구역과 요새를 정찰하는데서는 오백룡을 조장으로 하고 김철만, 한천추, 김혁철 등을 망라한 정찰조가 특출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오백룡이네 조는 국내정찰임무를 수십차례나 수행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무전기가 없어서 통신수단으로 비둘기를 리용하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둘기발목에 달린 늄통속에 도착보고를 써넣어 기지에 알리군했습니다. 1942년경부터는 국내와 만주에 침투된 대부분의 소부대들과 정찰소조들이 무전기를 리용하였습니다.
국내에 나올 때는 대체로 일본사람들이 국민복이라고 부르던 옷차림을 하고 지하족을 신었으며 마른 음식으로 끼니를 에웠습니다. 일단 국내에 나오면 기차나 자동차나 마소를 리용하지 않고 도보로 목적지까지 가군하였습니다.
우리는 정찰성원들에게 대상지역의 지리와 풍습, 말씨에 대하여서도 섬세하게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적들은 두만강연안과 북부국경지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소조들의 침투를 막기 위한 경계를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소부대나 소조들이 침투할만한 야산들에는 가는 실오리 같은것을 늘이고 상시적으로 살펴보다가 줄이 끊어지기만 하면 무작정 군경들과 주민들을 동원하여 수색을 들이대군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땅에 찍힌 신발자리를 보고 우리 정찰병들의 침투여부를 가늠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백룡정찰조 성원들은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번 겪었습니다.
한번은 이 정찰조의 성원들이 웅기(선봉)에서 경흥(은덕)쪽으로 넘어가는 저슬령이라는 고개에서 악질경방단원과 맞다든적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적의 군경들은 그 경방단원의 시체를 보고 저슬령일대에서 대대적인 수색소동을 벌렸습니다. 적들은 이 수색에 수백명의 주민들까지 동원시켰습니다.
우리 동무들이 가둑나무숲속에 몸을 숨기고있었지만 수색에 동원된 주민들은 우리 동무들을 보고도 못본척하였습니다.
김철만은 그날 가둑나무가지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혁명군이라는 글쪽지를 써서 걸어놓았습니다.
수색에 동원된 사람들은 그 글쪽지를 보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여기는 없다고 하면서 다음골짜기로 넘어가버렸습니다.
오백룡이네 정찰조는 국내공작과정에 림시비밀근거지들을 많이 개척해놓았습니다. 보로지산림시비밀근거지, 작은가매원림시비밀근거지, 청학산림시비밀근거지 등은 그 조가 개척한것들이였습니다.
우리 정찰조성원들은 이런 림시비밀근거지들에 의거하여 군중과의 사업도 주동적으로 전개해나갔습니다. 그 과정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찾아냈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숯구이를 하는 한 로인을 교양하여 정보공작도 하게 하고 신문, 잡지도 사들이게 하였는데 그가 어느 정도 정보공작에 숙달되자 청진항과 원산항을 정찰할데 대한 과업을 주어 현지에 파견하였습니다. 그 로인은 원산에 있는 친척집을 발판으로 삼고 오래동안 원산요새에 대한 정찰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 입수한 중요한 정보자료들을 오백룡이네 정찰조에 보고하였습니다.
오백룡은 보로지의 깊은 산중에서 농사도 짓고 숯구이도 하면서 일본말도 괜찮게 하는 사람을 정찰활동에 인입하여 얼마동안 단련시켰다가 일본으로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일본군은 그 지방에 있는 군마보충부들에서 길들인 말들을 매해 가을 일본에 실어가군했습니다. 그때마다 조선사람들중에서 말몰이군을 뽑아 일본에 데리고갔는데 오백룡은 그 말몰이군대렬에 자기가 장악한 그 사람을 슬쩍 끼워넣었습니다. 오백룡에게서 특수임무를 받은 그 사람은 일본에 건너간후 라진-니이가다, 청진-쯔루가 항로를 통하여 조선-일본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오백룡이네 정찰조의 활동에서 특징으로 되는것은 활동범위가 크고 자료가 매우 과학적인것이였습니다.
조선남단의 요새지들인 진해, 마산, 부산 일대의 정보들도 오백룡이네가 파견한 정보원들이 걷어들였습니다. 부산에 파견된 한 정보원은 잡화상을 하면서 정찰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려수요새에서도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이 활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찰활동을 통이 크게 벌리면서도 능숙하고 정확하게 하였습니다. 대일전쟁전야에 쏘련군대가 작성한 라진, 웅기, 청진 등 동해안지대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상륙작전계획은 전적으로 오백룡이네 정찰조가 수집한 자료에 기초한것이였습니다. 그 조가 항구들에 대한 정찰을 아주 대담무쌍하게 하였습니다.
김혁철은 이 정찰조가 배출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영웅전사입니다. 그는 열번째로 조국에 정찰공작을 나왔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습니다. 3명이 한조가 되여 국내에 나왔는데 그중에는 관절염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했지만 그 대원이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바람에 소조는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래서 김혁철이 그 대원을 업고 걸었습니다. 눈이 무데기로 내리는 날이여서 한걸음한걸음 힘들게 옮겼다고 합니다. 세사람이 눈구뎅이속에서 뭉개고있는 사이에 시간이 지체되여 강건너 접선장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있던 안내원은 철수해버렸습니다.
소조책임자는 며칠째 밥 한술 먹지 못한 전우들이 아사지경에 이른것을 보고 먹을것을 구해보려고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마을로 내려간 다음 김혁철이 지성을 다했으나 관절염때문에 신고하던 대원은 숨이 지고 말았습니다.
김혁철자신도 사실은 겨우 몸을 지탱하고있는 형편이였습니다. 김혁철은 눈속을 기여가다가 기운이 진해서 눈무지속에 쓰러진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기간에 김혁철이처럼 굶어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듬해 봄에 마을농민들이 그의 시신을 발견하고 두만강기슭에 묻어주었습니다. 관절염을 앓던 대원의 시신도 그의 옆에 나란히 안장하였습니다. 김혁철은 죽는 순간까지도 손에 권총을 틀어쥐고있었다고 합니다. 농민들이 그 권총을 보고 그들이 빨찌산이라는것을 알았을것입니다.
김혁철은 김정숙이 도천리에 가서 지하공작을 할 때 우리 부대에 데리고온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충실하였습니다. 도천리출신들이 모두 잘 싸웠습니다.
경흥요새구역 정찰은 손태춘이네 정찰조가 담당하였습니다. 그 정찰조도 일을 잘하였습니다.
손태춘네 정찰조는 웅기뒤산에 림시비밀근거지를 꾸리고 많은 정보자료들을 수집하였습니다. 손태춘은 1942년 여름에 적들의 포위에 들자 달려드는 적들을 맨주먹으로 때려눕히며 싸우다가 영웅적으로 전사하였습니다.
손태춘은 화룡유격대에 있다가 우리 주력부대에 편입된 사람입니다. 우리 부대에 넘어와서는 분대장도 하고 소대장도 하였습니다. 같은 화룡출신들인 박영순과 김주현이 그를 몹시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은 손태춘을 두고 똑똑하고 대가 세며 신념이 강하고 절개가 굳은 열정가라고 하였습니다.
손태춘에 대한 평가는 조금도 과장된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전우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사람이였습니다. 유격대경력으로 말하면 김주현과 입대년도가 같은 로병급이였습니다. 그는 고수머리에 미남이였습니다.
손태춘에게는 그의 사람됨을 말해주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화룡에서 살 때 부모들끼리의 약속으로 한 처녀와 짝을 뭇게 되여있었습니다.
부모들끼리의 혼약과는 관계없이 그들은 서로 상대를 열렬히 사랑하였습니다. 두사람사이에 곡절이 생기기 시작한것은 혁명가인 처녀의 오빠가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하게 된데다가 빚때문에 지주에게 오막살이를 차압당하고 온 식구가 도가집살이를 하게 된 때부터였습니다.
그 당시 손태춘은 장인강이라는곳에서 공청사업을 하였습니다. 약혼녀의 일가가 겪는 참상을 보게 된 그는 심장이 당장 터질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손태춘이한테는 처녀네 집을 도와줄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궁리하던 끝에 멀지 않은 마을에서 공청생활을 하는 김 아무개란 청년의 아버지에게 자기가 좋은 며느리감을 소개해주겠는데 그대신 소 1마리를 줄수 없겠는가고 물었습니다. 좋은 며느리감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그 청년의 아버지는 몇해후에 소값을 갚아주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손태춘이 약속한 좋은 며느리감이란 자기의 약혼녀를 념두에 둔것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소 1마리를 얻게 된 손태춘은 그 소를 팔아 지주에게 진 빚을 물어주고 차압당한 오막살이를 찾아 약혼녀의 일가를 도가집에서 건져주었습니다. 그 다음에야 처녀를 만나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처녀는 처음에 다른 집에는 절대로 시집을 안간다고 울며 불며 야단이였습니다. 그러나 손태춘이 난들 왜 동무를 남의 집에 보내고싶겠는가, 우리들이 지주의 학대속에 울고있는 아버지, 어머니와 오빠, 언니, 동생들을 위해 사랑이야 희생시키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설복하는 바람에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슬프게 울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잔치를 하는 날 《토벌대》가 마을로 쳐들어왔습니다. 마을은 수라장이 되고 신랑, 신부는 첫날옷차림으로 황황히 집을 떠났습니다. 온 일가가 흩어지다나니 신랑은 유격대로 들어가고 신부는 다시 적구에 남아 공청사업을 하게 되였다는것입니다.
손태춘도 유격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김 아무개 청년은 그후 왕청유격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이래저래 불행한 그 녀인은 손태춘을 잊지 못하여 한생을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나는 손태춘을 늘 어려운 모퉁이에 파견하군하였습니다. 그는 간삼봉전투와 무산지구전투, 홍기하전투를 비롯하여 우리가 조직하고 지휘한 중요한 전투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였으며 그때마다 남다른 기개와 영웅성을 발휘하였습니다. 홍기하전투때에는 전방척후로서 자기 임무를 책임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손태춘이네 집안은 왕청의 오태희네 가문처럼 온 일가가 항일전에 몸을 바친 혁명가의 가문입니다. 손태이, 손태운, 손태룡 등 그의 많은 형제들도 유격대와 혁명조직에서 싸우다가 희생되였습니다.
김학송은 경흥요새구역정찰을 하다가 전사했습니다. 그도 손태춘이처럼 적의 포위에 들었다고 합니다. 수집한 정찰자료를 김봉석에게 넘겨주고 적을 자기에게로 유인하다가 희생되였습니다.
청진, 라남 요새정찰에는 한태룡이네 조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일본헌병으로, 때로는 구두쟁이로, 때로는 인력거군으로 신분을 위장해가면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위장을 잘하고 림기응변해도 산에 있는 고사포진지에 대해서는 경계가 너무 심해 정찰을 할수 없었습니다. 진지가까이에 가보아야 포의 구경과 문수를 확인할수 있겠는데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느날 한태룡이네는 고사포진지쪽으로 뻗은 올리막길로 손달구지를 힘겹게 끌고가는 로인을 보았습니다. 로인이 하도 힘들게 오르기에 그 손달구지를 밀어주었습니다. 로인은 고맙다고 하면서 치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태룡은 《류랑걸식》하는 자기네 신세를 개탄하였습니다. 그러자 로인은 그를 동정하면서 왜놈들이 망해야 조선사람 살길이 열리겠는데 하면서 탄식하였습니다. 한태룡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고사포진지를 가리켜보이며 일본사람들이 대포를 저렇게 많이 가지고있는데 왜 망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저 산의 대포는 대부분 가짜이다, 진짜대포는 몇문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나무로 만든 가짜포이다, 여기서 나무를 찍어서는 껍질을 벗기고 뼁끼칠을 해서 진지로 날라가군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청진일대의 무력배치와 청진항에서의 배들의 입출항, 물자수송 정형까지 다 꿰들고있었습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수집한 자료와 대조한 결과 신통히도 딱 맞아떨어졌다고 합니다.
온성, 경원, 경흥을 비롯한 북부국경지대의 요새구역과 요새 정찰에서는 박광선이네 정찰조와 홍춘수네 정찰조가 큰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박광선이네 정찰조는 군사정찰과 대중공작을 잘 결합시켰습니다. 그들은 군사정찰에 주력을 돌리면서도 대중을 혁명화하기 위한 정치사업을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군중과의 사업을 잘하다나니 군사정찰에서도 인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온성, 웅기, 경원, 경흥, 라진 일대에는 1930년대초부터 우리가 꾸려놓은 조직들이 많았습니다. 박광선이네 정찰조가 많은 정보자료들을 수집할수 있은것은 이 조직들을 잘 발동시킨데 있었습니다.
해방후 박광선은 소부대시절을 회상하면서 자기네 정찰조가 함경북도북부일대에 나와서 활동할 때 온성사람들의 신세를 제일 많이 졌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1930년대 전반기부터 《길림바람》과 《간도바람》을 많이 맞으면서 원군운동을 꾸준히 해온 조직성원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네가 온성에 가서 우연히 손을 잡은 구장도 지하조직원이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구장은 우리 정찰조 성원들을 만나서는 오늘밤은 두만강나루터에서 단속을 강화하라는 지령이 떨어졌으니 강을 건느지 말라든가 전화도청을 하려면 어디서 하는것이 안전하다는 식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제때에 귀띔해주군하였습니다.
박광선이네 정찰조를 도와준 사람들가운데는 남양헌병분대에서 헌병오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사람이 헌병오장을 한다는것은 드문 일이였습니다. 간혹 홍종우처럼 헌병보조원을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헌병오장을 하는 조선사람은 흔치 않았습니다.
박광선이네는 이 오장을 쟁취하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오장과 접촉하는 과정에 그가 1940년대 초기부터 손장춘과 련계를 맺어온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라는것이 판명되였습니다. 손장춘이 경원군에서 소부대활동을 하다가 전사한후 그는 인민혁명군의 줄이 와닿기를 기다리면서 깊숙이 잠복해있었습니다.
헌병오장은 헌병대에서 오가는 모든 정보자료들을 정찰조에 빠짐없이 전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성원들과 혁명조직성원들의 신변도 잘 보호해주었습니다.
한번은 소부대의 1개 소조가 두만강류역의 요새구역들에 대한 정찰을 하다가 적들에게 단속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헌병오장은 우리 동무들을 붙잡아놓고 경비를 서고있는 경방단원들과 밀정들에게 자기가 직접 확인해봐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단속된 사람들이 헌병대소속의 《밀정》들인데 제편사람들을 잡았다고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나서 우리 소조원들을 놓아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남양은 국경일대 요새구역들과 일본본토와의 련계를 보장하는 중계지점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북부국경지대에서 중국 동북지방과 련결된 중요 도로와 철도, 통신망이 주로 남양을 통하게 되여있었고 대륙침략을 위한 보급물자들도 남양을 거쳐 동북지방으로 들어가게 되여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정찰조가 남양의 헌병오장을 정보공작에 인입한것은 적후공작에서 하나의 큰 소득이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소조들은 군사정찰에 적기관복무자들도 대담하게 인입하였습니다. 서수라경찰서에서 급사로 일하던 사람은 경흥요새구역과 라진요새의 정찰에 참가한 우리 소조성원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열성을 내여 서장의 신임을 얻은 다음 여러가지 정보자료들을 수집하였으며 나중에는 중요군사기밀문건까지 빼내였습니다. 한창봉과 조명선이 북부국경지대에서 활동할 때 자주 드나들던 청학의 일본경찰들중에는 그들의 영향하에서 우리의 정보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소부대들과 소조들은 정찰활동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작전기도와 병력이동정형을 수시로 살피면서 우리가 최후공격작전을 수립하는데서 참고로 삼아야 할 가치있는 자료들을 무수히 수집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속임수를 잘 썼기때문에 우리 동무들은 반복정찰을 많이 하였습니다. 적들이 별의별 오그랑수를 다 썼지만 우리 정찰조성원들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습니다.
윤태흥도 관동군 제1방면군의 조직상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여 국제련합군지휘부의 대일작전계획수립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적통치구역에 많은 공작원들을 장기적으로 침투시키는데도 큰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때 우리 공작원들은 적구의 여러 주요개소에 깊숙이 박혀있었는데 지어 위만군과 위만경찰은 물론, 일본군부대들에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지하공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지하공작원은 어떤 환경에서나 자기를 파견한 사람이 소환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공작지를 함부로 떠나도 안되고 공작비밀을 루설해도 안됩니다. 이 원칙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우리 동무들은 이 원칙을 생명으로 지켰습니다.
지경수의 경우를 봅시다. 우리 사령부는 최후공격작전을 앞두고 그에게 적구에 들어가 장기적으로 잠복하여 지하공작을 진행할데 대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공작지는 쏘만국경연선으로 정해주었습니다.
지경수는 공작금으로 땅도 사고 집도 사고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는 지주행세를 하면서 능란한 방법으로 일본군경들을 끌어당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뽑아낸 극비자료들을 수시로 사령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가 보낸 자료들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공격작전에서 은을 냈습니다.
우리는 조국이 해방된 다음에도 그를 소환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잠복해있는곳이 미구에 장개석군대와의 결전이 벌어지게 될 고장이라는것을 고려했기때문이였습니다.
지경수는 공작지가 해방되자 소작인들이 달려들기전에 미리 토지와 집을 내놓고 수걱수걱 농사차비를 하였습니다. 토지와 집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덕에 그는 타도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이 지대가 국민당군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였습니다. 지경수는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었던 땅을 도로 찾은 다음 이전날처럼 또다시 지주행세를 하면서 국민당군대상층과 친교를 맺고 그들에게서 귀중한 정보자료들을 뽑아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말없이 공로를 세운 지경수자신은 동북이 국민당군대의 치하에서 해방되자 반동파로 몰려 심판대에 끌려나가 농민들의 손에 맞아 죽을번하였습니다. 그때 지경수는 심판장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심판장에 갔던 우리 동무들이 지경수를 항일유격대원이라고 보증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 큰 봉변을 당했을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지경수를 인차 조국으로 소환하였습니다.
훈춘현 밀강부근에는 쏙새골이라는 고장이 있습니다. 이 고장에 렴로인이라는 늙은이가 있었습니다. 렴로인은 짐승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일반주민들에게 짐승사냥을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사냥허가를 주는 경우에는 꼭 자기네 정보활동을 도와달라는 조건부를 붙이군했습니다. 렴로인도 이런 부대조건을 받아들이고 짐승사냥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문정찰을 맡은 임철이네가 이 로인에게 접근해서 협조를 호소하였습니다. 렴로인은 협조를 약속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일본놈들의 지령과 유격대의 주문을 동시에 집행하는 2중역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로인은 적들에게는 가짜정보를 제공하고 유격대원들에게는 진짜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임철이네 소조가 도문정찰에 성공한것은 이 로인을 잘 리용하였기때문이였습니다. 그전까지 도문지구에 파견된 정찰조들은 적의 반탐에 걸려 실패했는데 이 조만은 성공하였습니다. 도문은 일제의 비밀정탐기관들과 군경들의 집결지였습니다.
해방후 사람들은 일본놈의 밀정질을 한 반동이라고 하면서 렴로인네 가산을 다 몰수하였습니다. 그도 지경수처럼 심판장에 끌려나가 욕을 좀 보았던것 같습니다. 1946년초에 임철이 렴로인을 보증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렴로인은 애국자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였습니다.
대일작전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군사정치활동은 대일작전이 박두해옴에 따라 더욱 적극화되였습니다.
패망전야에 일본 정계와 군부에서는 《조선을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이 자활자전체제에서 대륙전쟁의 병참기지, 최종전쟁거점으로 될뿐아니라 일본 최후의 운명수혈로로 된다고 하면서 끝까지 내놓지 않겠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습니다. 《조선사수론》은 조선을 마지막지탱점으로 해서라도 끝까지 싸워 잔명을 유지하겠다는것입니다. 이른바 《조선사수론》이 실천에 옮겨진다는것은 곧 조선땅이 일제를 격멸하는 최후결전장으로 된다는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우리는 국내정찰에 더 많은 력량을 투입하여 적들의 중요한 군사비밀을 새롭게 밝혀내는데 큰 힘을 넣었습니다.
그가운데서도 적군용비행장에 대한 정찰은 특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전쟁을 계단식으로 확대하면서 조선과 만주에 많은 비행장들을 신설하거나 확장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동해안일대에 비행장들을 건설하였는데 청진이요, 길주요 하는곳들에 있는 비행장들이 모두 전쟁을 확대하는 과정에 건설된것들입니다.
그런데 길주에 새로 건설한 비행장에서는 비행기가 뜨는족족 모두 곤두박질을 하군했습니다. 시험비행을 여러번 해본 다음에야 길주지구대의 기류가 비행기들을 잡아먹는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인차 이 비행장을 페쇄해버렸습니다. 비행장을 건설하는통에 숱한 농민들이 농토를 잃고 한지에 나앉았습니다. 동해안지구에 파견된 우리 동무들은 이런 자료까지도 다 수집해왔습니다.
회령비행장을 정찰한 소조성원들은 이 비행장에는 진짜비행기가 몇대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는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동해안으로 해서 평양까지 간 김자린조는 모란봉에 올라가서 비행장을 촬영하였습니다.
비행장에는 비행기수리와 자동차수리를 동시에 맡아보는 수리공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부속품창고, 운수직장, 병원, 식당을 비롯한 여러개의 부속건물들도 있었습니다. 김자린정찰조는 이 모든것을 다 사진에 담았습니다. 비행장내부에는 일본헌병으로 가장하고 들어갔습니다.
북만에 파견된 김대홍이도 비행장정찰을 잘했습니다. 그는 품팔이군으로 가장하고 4개월동안이나 쏘만국경지대에 있는 비행장에 대한 정찰을 하였습니다. 그 비행장에도 진짜비행기는 20대미만이였습니다. 나머지는 가짜비행기였다고 합니다.
우리 정찰병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떤 정찰병들은 적의 이동정형을 정찰하기 위해 철길가까이에 있는 구조물의 어지러운 물속에 며칠씩 잠복해있으면서 군용렬차 통과시간과 편성을 조사했으며 어떤 정찰병들은 무더운 여름날 적들의 전술훈련상태를 정찰하기 위해 하루종일 숨막히는 오소리굴같은데 들어가 비지땀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훈련기지로부터 수백키로메터 떨어진곳에서 정찰활동을 하다가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한 한 정찰소조의 활동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정찰조는 지정된 날이 되면 사령부에 무전으로 정찰결과를 꼭꼭 보고하군하였습니다. 정찰자료들이 풍부하고 정확한데다가 제때에 보고되였기때문에 우리는 물론, 쏘련동무들도 대단히 만족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정찰조가 무전으로 비상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정찰조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는것, 무전기는 산꼭대기에 위치하고있는데 마지막정보자료를 보내니 빨리 받아달라는것이였습니다.
지금 적들이 무전기가 있는 산을 포위하고 가까이 접근하고있다는것, 젊은 대원이 먼저 나가 결사전을 벌리다가 전사했고 뒤이어 아바이대원도 전사했다는것, 지금은 무전수인 자기가 자료송신을 끝내고 수류탄묶음을 폭파시켜 달려드는 적들을 한놈이라도 잡고 죽겠다는 내용이였습니다.
남만출신인 그 처녀무전수는 이런 내용의 전파를 날리고 영웅적으로 전사하였습니다.
김홍수도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는 1943년에 정찰임무를 받고 훈춘쪽에 나왔다가 체포되였습니다. 놈들은 그에게 갖은 악형을 다하면서 비밀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홍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그를 감자를 가는 기계에 집어넣어 갈아죽였습니다.
그의 최후에 대한 기사가 국제련합군 신문에 크게 소개되였습니다.
어려운 일이 나서면 말없이 맡아나서군하여 내가 몹시 아끼던 전사였는데 그렇게 처절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지봉손도 같은해 봄에 정찰을 나갔다가 훈춘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소조들의 정찰활동과 그 과정에 발현된 그들의 영웅적투쟁에 대해서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대일작전의 돌파구를 열어나가던 적후정찰활동의 나날에 우리가 이룩한 성과는 인민들의 지지를 떼여놓고는 생각할수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우리는 어려운 적후정찰을 준비하면서 인민들의 방조에 큰 기대를 걸었으며 파견되는 소부대, 소조 성원들에게 적후에서 반드시 인민에 의거하며 인민의 도움을 받을데 대하여 다시금 강조하군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적후정찰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 그전에 우리가 동북땅이나 국내에서 꽝꽝 소리치며 대부대유격전을 벌리던 때처럼 인민들과 친숙하고 혈연적인 뉴대로 얽히며 그들의 리해와 공감과 지지를 받을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저으기 걱정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일작전의 혈로를 헤치는 이 간고한 투쟁에서 우리는 걸음걸음 인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으며 우리가 변함없이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한것이 천백번 옳았다는것을 실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나날에 우리가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한것처럼 인민들도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을 믿고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싸우고있다는것을 더욱 뜨겁게 알게 되였습니다.
우리가 인민을 믿고 인민이 우리를 믿고 온 민족이 우리를 지지하는 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이 진리, 이 확신은 우리에게 천백배의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으며 일제격멸의 최후결전에로 우리를 세차게 떠밀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수집한 수백수천건에 달하는 정찰자료들은 대일작전의 준비와 최후승리에 큰 도움으로 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러한 대담하고 폭넓은 정찰활동이 없었더라면 100만관동군을 격파하는 대일작전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승리적으로 결속될수 없었을것입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1940년대 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이 적극적인 소부대, 소조 활동과 꾸준하고 과감한 군사정찰활동으로 대일작전의 돌파구를 피로써 개척하여 일본제국주의를 격멸소탕하는데서 선봉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데 대하여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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