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구 선생님의 유일무이한 해외여행 베트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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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5-01-25 11:23 조회 3,346 댓글 0본문
안재구
베트남 이야기를 하셨으니 제가 1969년, 한참 이른바 한국군이 거기에 들어가서 미국놈의 용병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저의 직장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교수를 하고 있으며 보직으로 문리과대학 학생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학생들의 데모가 있으면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책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가 박정의가 대통령에 세번째 출마할 때였습니다. 학생들은 이를 반대해서 연일 시위를 하고 있었고 진압경찰의 곤봉대에 맞서 투석으로 그야말로 격전을 하던 시대였습니다.
방학이 시작되어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9월에 들어가면 국회에 그 개헌안을 내어놓아야 하는데, 시위는 숙으러들 기미는 없자, 정부와 대학 당국은 공동으로 방안을 낸 것이 각대학-대학교의 총학생회 간부들로 '파월국군위문단'을 조직해서 9월 개헌전까지 이들을 격리시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국대학생 파월국군위문단』을 조짓했는데 제가 거기에 인솔교수 중 1명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단 한번뿐인 외국나들이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준비를 해가지고 중앙청의 문교부가 주최하는 지시를 교육받고, 또 여권과 출국을 위한 수속을 마치고 부산 해군부두에서 승선을 했는데, 그것이 파월국군의 병참을 맡고있는 수송선, 이른바 LST였습니다.
이를 타고 다음다음날인가 대만의 타이페이항에 도착 하룻밤을 호텔에서 자고 그 이튿날 대만대학을 방문했고 대만 고궁박물관을 견학했는데 많은 문화재를 감상해서 좋은 견문을 가졌습니다.
다시 타이페이항에서 타고온 LST를 타고 며칠을 갔는데 이 날이 며칠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짜의 기억을 드덤기 위해 한참 생각하다가 우리가 사이공에 도착한 날, 이 날 늦은 오후에 도착했는데 다른 소도시에서도 길거리의 상인과 시만들이 그처럼 북적댔는데 남부월남의 최대도시 사이공이 너무나 조용해서 좀 이상했다. 거리에 나온 사람, 그 싹싹한 월남 소녀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주월사령부정훈처인가에서 나온 장교에게 물었다.
"월남 아가씨가 다낭이나 후에나 다른 데에서는 그처럼 잘 웃고 명랑한 인상인데 여기 아이들은 왜 저리 미소 하나 보이지 않고, 얌전도 아니고, ... 여기 남쪽 아가씨는 이처럼 늘 보기에 얌전하거나, 쌀쌀한가요?"
라고 물었다.
"아니요. 지금 이곳은 온나라가 쓸픔에 잠겨있습니다. 오늘 몇 시간전에 월남사람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아저씨라고 불리면서 가장 친근한 북월남의 여기 사람들의 말로 튼어른이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이처럼 철시를 하고, 보세요, 상점의 문이 모두 잠겼지 않소."
나는 깜짝 놀라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이럴 수가! 하필 우리가 사이공에 온 날에."
나도 모르게 뻘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호 할아버지! 그만 돌아가셨습니까."
나는 평소 호찌민 주석님을 늘 속으로 나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호지명(조선한자 발음) 할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와 동갑 1890년생이었고 모두 자기나라의 식민지시대 초에 출생하셔서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사시디가 돌아가셨다. 비록 민족해방투쟁에서 맡아계신 지위는 달라도 하시는 일은 그 지위에 불문하고 평생을 한길로만 가셨기 때문일 것이고, 또 호지명 선생은 친손자가 계신지는 몰라도 전체 베트남 인민의 어린이를 모두 자기손자로 알고 계시면서 살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한번도 뵌 적은 없으나 더러 그 인자하신 초상을 책상 깊이 감추고 할아버지 사진과 함께 두고 할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내보던 때도 있었다.
그 정훈처 장교의 안내를 받아 주월사령부 안의 한 병사로 안내되어 잠자리를 준비했다. 낯설고 호기심 많이나는 이국 남쪽나라이지만 나올 호기심도 없어지고 그저 멍멍하기만 했다.
이 9월 2일 때문에 내가 이 글을 쓰는데 날짜를 비교적 정확하게 쓸 수있게 되었다.
오늘은 이 까지만 쓰겠습니다.
***) 다음은 각 부대방문, 그리고 월남 사람들 소묘. 민족의식, 나의 아우(지금은 평양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와의 월남토론, 그리고 귀국선에서.
이런 차례로 쓸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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