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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및 국회의원 협의회 (리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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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5-07-17 05:35 조회 7,47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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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공애국세력의 확대,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

 

리승만역도가 1949년 9월 인천항에 기항한 미국전함 《센트 폴》호의 갑판우에서 워싱톤으로부터의 북진신호만 떨어지면 제놈들이 《3일안으로 평양을 점령》할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던것과는 정반대로 반격으로 넘어간 조선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하였다. 150만 인구가 살고있던 서울은 불도가니처럼 끓었다. 인민군땅크가 까부신 철문으로 쏟아져나온 7 000여명의 수인들속에서는 《국회》소장파의원의 핵심인물 13명도 들어있었다. 《만세!》의 환호성으로 끓어번진 서울거리의 중심가인 종로연도에는 한국독립당 위원장인 70고령의 조완구, 부위원장 조소앙, 상무위원 엄항섭, 김의한 등을 비롯한 림정계민족주의자들, 련공애국인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만세를 웨치면서 인민군장병들에게 환영인쇄물을 안겨주었다.

서울해방에 감격한 김규식은 《김일성장군께서는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도발한 북침전쟁을 저지파탄시키고 인민군대를 반공격에로 이끄시여 불과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하시였소. 이것은 세계전쟁사상 류례없는 일이요!》라고 웨쳤다.

서울이 해방되자 사회당 위원장 조소앙의 저택으로 리승만도당과 결별한 수많은 서울잔류파의 정치인들과 《국회》의원들이 몰려와 향후 거취문제를 론의하고 공화국정권에 합류할 결의들을 피력하였다.

7월 7일 김규식,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안재홍, 조소앙, 오하영 등 련공애국인사들은 곧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 결성을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들이 벌린 사업은 물론 쉽지 않은것이였다.

그 리유는 첫째로, 남조선정계인사들을 하나라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서 떼여내기 위해 음으로양으로 벌리고있는 박헌영, 리승엽도당의 방해책동과 위협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며 둘째로, 비록 리승만도당과 결별은 하였지만 자신들의 계급적제한성과 정치적미숙성으로 하여 적지 않은 서울잔류파정치인들이 아직도 반신반의속에서 은거생활을 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높이 받들고 기어이 그 일을 해냈다.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를 뭇기 위해 서울 중구 다옥동에 있는 성남그릴을 찾는 사람의 수는 날로 늘어났다. 7월 20일에 있은 인민군대의 대전해방은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결성사업을 촉진시킨 기폭제의 역할을 놀았다.

이리하여 7월 22일 마침내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가 발족하게 되였다.

처음 여기에는 쑥섬협의회의 결실인 통일촉진협의회에 소속 되여있었던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윤기섭, 김의한, 조시원, 장건상 등과 같은 림정계련공애국인사들과 류동열, 송호성 등 림정계의 《국군》장성원로들, 리승만과 결별한 서울잔류파로 불리우는 초대, 2대《국회》의원들, 기타 학계, 사회계인사들 50여명이 망라되였다.

협의회는 김규식, 조완구를 명예고문으로, 오하영, 안재홍을 의장단 성원으로 천거하고 조소앙이 상임의장으로 선출되였다.

남북협상파-통일애국세력은 전화속에서 그 대오를 이렇게 확대하였던것이다.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는 출항의 고동을 울리기가 바쁘게 정력적으로 일에 달라붙었다.

그 성원들은 신문, 통신, 방송을 통해 성명서, 담화, 호소문 등을 발표하는 정치선전사업을 진취적으로 벌려 인민군대와 우리 인민의 정의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그런데 1950년 9월에 접어들면서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에 망라된 남조선 각계 인사들은 예기치 못했던 하나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였다.

미제침략군의 인천상륙직후인 9월 17일 성남그릴에 나타난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리승엽은 정세의 그 무슨 역전을 운운하면서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의 해산을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그자는 협의회에 망라된 사람들이 살겠으면 뿔뿔이 피난길에 올라 은거하라고 떠들어댔다.

이것은 리승엽의 협의회해산명령이였다.

이에 격분한 협의회성원들속에서는 《숨으라는 소리는 곧 죽으라는 소리나 같다. 지금 이 판에 어디에 피난가서 숨으라는것인가. 우리는 입북만을 소망한다.》, 《조직적인 입북조치를 요망한다.》는 흥분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리승엽은 《당신들 같은 우익반공정객들은 공화국북반부에 입북시켜줄수 없다. 조직적인 입북조치란 있을수 없다.》고 뇌까린 다음 사라지고말았다. 리승엽의 망발과 협의회해산조치로 하여 서울해방후 희망에 부풀었던 련공애국인사들을 비롯한 정치인 및 《국회》의원들은 분노의 치를 떨었다.

서울해방후 그 악당은 《토지조사위원회》란것을 조작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방금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온 소장파의원들까지 잡아다가 취조한 일도 있었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그들이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토지조사위원회》를 해산시키고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시지 않았더라면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으리라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9월 18일부터 북행길에 올랐다.

북행길에 오른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에 망라된 인사들의 제1진이 평양에 도착한 날은 1950년 9월 20일이였다. 그 뒤를 이어 많은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여 강계를 거쳐 만포까지 들어가고 전후에 평양에서 마지막깃을 폈다. 그때부터 그들은 재북인사로 불리워지게 되고 그들에 의해 1956년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가 결성되였다.

이렇게 놓고볼 때 1950년의 6. 28서울해방과 함께 서울에서 발족된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는 명실공히 통협의 초석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렇듯 통협은 뿌리도 있고 자기의 튼튼한 주추돌도 가지고있는 단체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북으로 향하는 남조선정객들의 대오속에서 조봉암의 얼굴을 찾아볼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회》부의장의 직제를 지니고 그 시각에 리승만이 《림시수도》로 정하고있는 부산에 가있었던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였는가?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조봉암은 자기의 사무실인 《국회》부의장실에서 동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위대한김일성장군님께서 하신 력사적인 방송연설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를 경청한 다음 자기의 비장한 결심을 동료들에게 피력하였다.

그는 서울해방이 림박하였으나 자기는 남지 않고 패주하는 리승만을 따라 남쪽으로 나갈것이라고 말하였다.

조봉암으로 말하면 젊은 시절에 독립운동에 몸을 잠그면서 모스크바와 상해에서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한바도 있었고 1925년에 있은 조선공산당창건사업에 참여하여 그 검사위원으로 취임한 일도 있었던 사람이였다. 그리고 해방직후에는 남조선공산당 인천시위원장으로 활동한 경력도 가지고있었다. 그러던 그는 박헌영일당의 종파행위에 신물이 나서 1946년 봄 《동아일보》지상에 《박헌영에게 고함》이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에서 탈퇴해버렸다. 그후 그는 리승만괴뢰정부의 초대농림부 장관도 하였다.

조봉암은 자신의 이러한 복잡한 인생행로를 동료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자기가 서울에 남으면 박헌영, 리승엽일당이 복수를 위해 자기부터 숙청할것이 분명한즉 그럴바치고는 패주하는 리승만통치집단을 따라나가 자기가 차지하고있는 《국회》부의장 이라는 합법적지위를 리용하여 통일투쟁을 벌리는것이 합리적일것이라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모두 통일된 조국에서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힘껏 일하며 행복을 누려봅시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동료들은 그의 심정을 깊이 리해하고 그에 지지를 주었다.

조봉암은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매 력사적단계에서 리승만반역도당과 견결히 대결하였으며 1956년에 있은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평화통일구호를 들고 리승만역도에게 도전하여 일약 200만표이상의 지지표를 획득함으로써 력사의 반동들을 전률케 하였다.

리승만도당이 악에 받쳐 진보당사건을 조작하고 그에게 《간첩》의 감투를 뒤집어씌워 악랄하게 박해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그는 재판과정에 《반공국시》 그자체를 부정하였으며 우리 민족이 참생활을 누리는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공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아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교수대에 오를 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고 형리들이 물었을 때 《<보안법>이 조속히 철페되여야 할 악법이기때문에 내가 그것에 의한 마지막희생자가 되길 바랄뿐이다.》라고 한마디의 말만 남기였다.

이것은 그의 유언으로 되였다. 그런데 그의 이 유언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력사의 반동들에 의해 《보안법》은 의연히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흉기로 살판치고있다.

조봉암은 이렇게 민족의 제단에서 산화되였으나 그는 온 겨레의 추억속에서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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