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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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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710회 작성일 23-12-2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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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회)

제 3 장

거마리

2

(2)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손기척소리에 스기무라는 상념에서 깨여났다.

방에 들어온 급사소년이 다까하시부인이 오셨다고 말했을 때에야 그는 자기가 바로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던중이였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지금 조선궁성의 명절놀이에 초대되여간 다까하시 나쯔미를 기다리고있었다.

그가 명성황후와 얼마나 더 친숙해지고 또 명성황후로부터 어떤 자료를 뽑아가지고 올것인가, 이것이 그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명절놀이의 여흥때문인지 아니면 밤추위때문인지 두볼이 처녀애들처럼 분홍색을 띤 나쯔미가 방실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스기무라는 반색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옥상, 어서 오십시오.》

나쨩, 당신이 어떻게?!…》

다까하시도 놀란 소리를 하며 안해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계셨군요.》

나쯔미도 남편이 뜻밖에 이곳에 있는것이 의아쩍은듯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난처해진것은 스기무라였다.

어색한 기색으로 두손을 주물던 스기무라는 이윽고 다까하시에게 량해를 구했다.

다까하시상, 미안합니다만 먼저 가시든지 아니면 옆방에서 좀 기다려주실수 없을가요?》

《그러니 날더러 자리를 피해달라는거요?》

다까하시의 대머리가 벌겋게 달아오르는것을 본 스기무라는 변명하듯 급히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우린 사업상용무로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다까하시는 스기무라와 나쯔미를 언짢은 눈길로 흘겨보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

스기무라는 나쯔미에게 미안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옥상도 리해하십시오. 때에 따라서는 남편에게도 숨기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있으니까요. 제 말의 뜻을 알겠습니까?》

나쯔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해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스기무라는 가벼우면서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래, 오늘 하루 즐거웠습니까?》

어느새 기분을 전환한 나쯔미는 두손을 가슴우에 포개얹으며 감탄했다.

아유, 굉장했어요. 대리공사님도 참가했으면 좋았을걸 그랬어요.》

《참가하면 뭘합니까. 주인공인 왕비전하는 알현하지도 못할걸.》

《하긴 그래요. 참, 그런데 알렌이라는 미국사람만은 례외더군요.》

《그 미국친구는 묘하게 운수가 좋단 말입니다. 명성황후의 담당의사라고 특권을 혼자 누리고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명성황후는 어떻습니까?》

《뵈올수록 매혹적인분이예요. 아름답고 지혜롭고 영특하고 친절하고…》

스기무라는 가벼운 웃음을 웃었다.

《반했군요, 다까하시부인.》

《그래요. 그 상냥한 웃음, 기지있는 말, 화려한 옷, 우아한 걸음걸이… 어쨌든 왕비께선 자기 나라에 대해서도 긍지를 가지고있고 자신에 대해서도 신심에 넘쳐있었어요. 한마디로 자긍심높은분이예요.》

스기무라의 얼굴에 우려에 가까운 야릇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매력있는 왕비전하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그 인상담을 좀 들어봅시다.》

나쯔미는 천진하다 할 정도로 자기가 보고 느낀바를 꾸밈없이 계속 피력하였다.

전하께선 먼저 우리에게 작년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조선의 수공예품들을 보여주더군요. 그런데 코레아란 국호를 가리키면서 첫 글자가 영어자모에서 앞에 놓이기때문에 박람회진렬순위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앞자리를 차지했다고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리고…》

《가만, 가만.》

문득 스기무라가 나쯔미의 말을 중단시키고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국제행사에선 나라순서를 영어의 알파베트로 정하는것이 관례로 되고있다. 그러니 에이(A), 비(B), 씨(C), 코레아(COREA)는 씨(C)로 시작되니 조선은 세번째 앞자리에 놓이게 된단 말이지.

《내가 우리 일본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나쯔미가 말을 계속했다. 《일본은 영어발음으로 쟈판이니 한참 뒤꼬리에 놓인다고 비웃더군요.》

스기무라의 표정이 다시 긴장해졌다.

《명성황후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요?》

《아니, 그 비꼬는 소리는 알렌미국서기관이 했어요.》

《명성황후는?》

《그저 웃더군요.》

《웃었다?!… 이놈의 에이(A), 비(B), 씨(C)가 문제로군.》

《예?》

《아 아니, 혼자소립니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스기무라는 앞으로 국제행사들에서 조선이 계속 일본의 앞자리에 놓인다면 재미가 적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다.

그러자면… 그렇다. 씨(C) 코레아(COREA) 대신 케이(K) 코레아(KOREA)로 표기를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기발한 착상이 떠오른 스기무라는 자기로서도 자신이 무척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그런데 스기무라의 이 착상이 간특한 왜놈들에 의해 기정사실처럼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지어 스기무라자신도 이때는 예견하지 못하고있었다.

스기무라는 나쯔미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건너다보며 말을 꺼냈다.

다까하시부인, 명성황후와 계속 친하십시오》

《…》

《이제 부인이 우리 제국을 위해 큰일을 할수 있습니다.》

《…》

스기무라의 속심을 다는 알수 없어 나쯔미는 침묵을 지켰다.

나쯔미의 얼굴에서 자기 말을 리해하지 못한듯 아리숭한 표정을 읽은 스기무라는 진지한 기색으로 그 녀자와 마주앉았다.

다까하시부인, 내 말을 잘 새겨들으십시오.》

스기무라의 여느때 달리 신중한 태도를 보고 긴장감을 느낀 나쯔미는 무릎우에 놓은 두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전에 미국서기관 알렌에 대해서도 이야기됐지만…》 스기무라는 나쯔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말을 계속했다.《미국은 오래전부터 조선에 눈독을 들이고 침략책동을 감행해왔습니다. 〈셔먼〉호사건, 〈남연군묘〉도굴사건에 이어 신미(1871)년에는 조선에 대대적인 무력침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실패하자 이제는 보다 음흉하고 교활하게 책동하고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서 경제적리권을 빼앗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할뿐아니라 〈선교사〉, 〈교원〉, 〈의사〉, 〈고문〉등을 파견하여 장차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지반을 닦기 위해 부심하고있습니다. 미국뿐이 아닙니다. 조선에 침투하고있는 모든 나라들이 조선을 먹기 위해 음으르 양으로 책동하고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야마도족들이 떨떨해있다간 조선을 남들에게 허양 떼울수 있습니다. 부인도 알겠지만 우리 일본은 조선과 지리적으로 제일 가까울뿐아니라 력사적으로도 오래전부터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임진년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옛적부터 조선을 정복하는것은 우리 야마도의 숙원으로 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 숙원을 이룩할 날이 드디여 눈앞에 다가오고있습니다. 그러니 부인도 야마도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조상대대의 숙원을 이룩하기 위해 모든것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쯔미의 눈이 커지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것을 본 스기무라는 자기 말이 응당한 효력을 나타냈다고 생각했는지 만족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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